리에프는 아이의 양 팔을 단단히 움켜쥔 채 웃고 있었다. 제 앞에서 커다랗게 뜨인 눈이 엉망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가학심을 자극했다. 리에프는 쥔 채 덜덜 떨리는 손을 가만히 잡았다. 흠칫, 몸을 떨며 저를 보는 금빛 눈동자에 리에프는 씩 웃었다.

 

 

 

 

 

 “안 하고 뭐해요.”

 “, 리에프…….”

 “제가 뭐라고 했죠, 쿠로 상?”

 “, 못 하겠어…… 리에프, 제발…….”

 “그럼 쿠로 상 부모님이 죽어도 좋아요? 저는 쿠로 상 부모님이라면 쉽게 죽여 드릴 생각 없어요.”

 

 

 

 

 

 쿠로 상이랑 닮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며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덜덜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제 앞에 보이는 아이는 제 허리에도 미치지 못한 작은 아이였다. 손과 발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채 입에 재갈까지 물린 아이는 끅끅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마 엄마를 찾고 있거나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이었다. 쿠로오는 자꾸만 흐려지는 눈을 손등으로 문질러 씻어냈다. 리에프는 농담을 하는 법이 없었다. 죽일 거라면 죽였고, 섹스를 할 거라 하면 섹스를 했다. 이번 말도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닐 것이었다. 쿠로오는 몇 달 동안 보지 못한 부모님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지나 가는 것을 느꼈다. 혹시 리에프가 자신의 집을 모르지 않을까, 얄팍한 생각이 스쳤다.

 

 

 

 

 

 “쿠로 상 혹시 내가 쿠로 상 부모님이 어디 사시는 지 모를 것 같아서 이러는 거예요? 날 너무 과소평가한다.”

 

 

 

 

 

 입가를 휘었던 리에프는 아이의 어깨를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퍼억-! 옆으로 날아가는 아이를 보며 쿠로오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굳었다. 리에프의 발에 차인 아이는 벽에 부딪친 후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미동도 없었다. 쿠로오는 제 턱을 당기는 손에 시선을 돌렸다. 드물게 웃고 있지 않는 얼굴이 코앞에 다가왔다. 등골이 오싹하도록 어둡게 가라앉은 초록빛 눈동자가 닿을 듯 가까웠다. 쿠로 상 저한테 이름 가르쳐 줬어요? 쿠로오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 눈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광기라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리에프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쿠로오는 문득 리에프에게 납치된 날을 떠올렸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지갑과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전화. 리에프가 그걸 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커다란 손이 눈을 가렸다.

 

 

 

 

 

 “결론이 났어요?”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어린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웠다. 쿠로오는 입술을 짓씹었다. 선택지는 결국 하나 뿐이었다. 리에프는 손바닥에서 묻어나는 물기에 손을 떼고 쿠로오의 몸을 돌렸다. , 내가 도와줄게요. 칼을 쥔 손 위로 제 손을 덮은 리에프가 몸으로 쿠로오를 밀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떼어 아이에게 다가간 쿠로오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세게 부딪친 듯 아이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쿠로오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물이 자꾸만 눈앞을 흐렸다. 준비 됐어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악마의 목소리였다. 쿠로오는 칼을 양 손으로 쥐고 천천히 높게 치켜들었다. 제 손을 감싼 손의 체온이 차가웠으면 좋았으련만, 악마의 손은 따뜻하기만 했다. 쿠로오는 이를 앙 물며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칼을 찍어 내렸다.

 

 

 푸욱.

 

 

 

 

 

 “아흐윽!!”

 “, 착하다.”

 “, , 흐으…….”

 “잘했어요. 하면 되잖아.”

 

 

 

 

 

 쿠로오는 살과 뼈가 갈리는 느낌에 퍼뜩 칼을 놓고 뒤로 몸을 물렸다. 자연스레 등에 닿아오는 체온에 쿠로오는 흐려진 정신으로 그 체온으로 파고들었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생고기를 썰 때의 느낌과 전혀 달랐다. 뼈가 갈리고 핏물이 베어 나왔다. 쿠로오는 여전히 제 손을 쥐고 놓아주지 않는 리에프를 돌아보았다. 리에프는 웃고 있었다.

 

 

 

 

 

 “칼 뽑아서 저 주셔야죠.”

 “, 리에프…… 나 못해…… 못하겠어…… ? 제발, 리에프…….”

 “이건 안 돼요. 이거까지 해야 인정해 줄 거예요.”

 

 

 

 

 

 어린 아이를 어르듯 하는 소리에 쿠로오는 차게 식은 손끝을 움켜쥐었다. , 얼른. 재촉하는 소리에 쿠로오는 칼을 쥐었다. 바닥을 적시기 시작하는 피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 칼을 뽑아들자 울컥, 피가 솟구쳐 쿠로오를 적셨다. 쿠로오는 덮쳐오는 비릿한 피 냄새에 칼을 떨어뜨리고 제 손아귀를 보았다. 피에 젖어 붉은 손에 쿠로오는 제 옷에 손을 문질러 닦아냈다. 싫어, 싫어……. 멍하니 울며 읊조리는 말에 리에프는 쿠로오의 고개를 돌려 입술에 묻은 핏물을 핥고 그대로 혀를 밀어 넣었다. 쿠로오는 섞이는 혀 사이로 아릿한 쇠 맛이 느껴지자 리에프를 밀어내려 버둥거렸다. 리에프는 그런 쿠로오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눕혔다. 쿠로오는 등에 닿는 축축한 느낌에 화들짝 놀라 제 어깨를 누르는 리에프의 팔을 잡았다.

 

 

 

 

 

 “그만, 리에프, 싫어, 하지 마!”

 “착하지? 가만히 있어.”

 “싫어 리에프, 여기서 싫어, 하지 마, 제발!”

 

 

 

 

 

 리에프는 쿠로오의 목에 연결된 쇠사슬을 위로 콱, 잡아 올렸다. 쿠로오는 순간 턱하니 목을 죄는 초커에 컥, 하며 입을 벌렸다. 그 사이로 혀를 집어넣은 리에프는 피에 젖은 손바닥으로 쿠로오의 뺨을 더듬었다. 온 몸이 선홍빛으로 예쁘게 물들어간다. 리에프는 혀를 떼며 이미 붉게 젖은 쿠로오의 티셔츠를 위로 밀어 올렸다. 초점을 잃은 금빛 눈동자가 무기력하게 리에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롯이 무력감과 공포로 점칠된 눈동자와 자신의 손아귀 안에 길들여져 가는 마른 몸뚱이 전부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것들뿐이었다. 리에프는 피로 쿠로오의 허벅지에 붉은 선을 그으며 웃었다.

 

 

 

 

 

 “역시 빨간 색이 잘 어울리네요. 예뻐.”

 

 

 

 

 

 쿠로오는 맨 살갗에 닿아오는 미끈거리고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가는 끈적한 액체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자신이 찌른 상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 쿠로오는 느릿하게 제 살결을 핥아 올리는 혀에 리에프의 어깨를 쥐었다. 리에프의 눈이 휘었다. 공범 됐네요, 그쵸. 피에 흠뻑 젖은 쿠로오는 꼭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 같았다. 리에프는 이미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에 쿠로오를 안아 올려 욕실 안으로 향했다. 금세 식은 피가 쿠로오의 체온을 낮추고 있었다. 욕조에 쿠로오를 내려놓은 리에프는 따뜻한 물을 틀어 쿠로오의 머리 위로 쏟아냈다.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떠는 어깨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작아져 있었다. 내일 메뉴를 뭐로 만들어 줄까. 리에프는 씻겨 내려가는 핏물을 보다 쿠로오의 턱을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뭐 먹고 싶어요? 쿠로 상 첫 살인 기념으로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 지난번처럼 토하면 안돼요.”

 

 

 

 

 

 싱긋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웃고 있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질 때 즈음, 쿠로오가 낮게 중얼거렸다. , 먹고 싶은 거. 그 말에 다시 씩 웃은 리에프는 쿠로오의 젖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맛있는 걸로 해줄게요. 붉게 물들었던 옷에서 핏기가 빠져가는 걸 가만히 보건 쿠로오는 제 어깨를 감싸 안는 팔에 머리를 기댔다. 비릿한 피비린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리에프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봉지를 흔들었다. 쿠로오가 끊어내려 안간힘을 쓴 탓에 헤진 초커를 사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요 며칠 쿠로오는 꽤나 얌전하게 굴었다. 살인을 시킨 이후 쿠로오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밀랍인형 마냥 제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마음에 들어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것에 재미가 없어지면 또 다른 일을 시켜야겠지만. 시간을 시킬까 따위를 생각하며 문을 연 리에프는 그 자리에서 봉지를 떨어뜨렸다. 허공에 흔들리는 발끝에 리에프는 급히 축 늘어진 그 몸뚱이를 안아 들어올렸다. 툭하니 뒤로 꺾이는 목에 친친 감긴 얇은 사슬들에 리에프는 이를 갈았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벽에 몸을 붙이며 한 손으로 버틴 리에프는 손을 뻗어 그 목에 감긴 사슬을 풀어냈다.

 

 

 

 

 

 “-, -.”

 

 

 

 

 

 진짜 재밌어. 이를 드러내며 웃은 리에프는 바닥에 시체처럼 차가운 몸을 내려놓았다. 목줄기를 눌러 맥박을 잡자 얄팍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리에프는 죽은 듯 누워있는 쿠로오의 옆에 앉아 낄낄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숨넘어갈 듯 웃어 재끼던 리에프는 쿠로오의 손끝이 움찔,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마음대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힘없이 뜨인 눈은 탁한 빛이었다. 리에프는 이제 조금씩 핏기가 도는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혀를 밀어 넣은 입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리에프는 제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을 아랑곳 하지 않고 좀 더 깊게 키스했다. , 하는 목소리가 긁듯이 튀어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졸려 숨이 모자랐건만 짙은 키스 탓에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리에프는 제 옷깃을 움켜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입술을 떼고 쿠로오의 몸을 일으켜 제 품에 안았다. 휘청거릴 틈도 없이 그 품에 기댄 쿠로오는 여전히 핑핑 도는 어지러운 머리에 눈을 감고 숨을 헐떡였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아, 못 죽었다. 쿠로오의 숨이 좀 진정되자 리에프는 새빨갛게 줄이 난 목덜미를 선을 따라 혀를 내어 핥았다.

 

 

 

 

 

 “죽고 싶었어요?”

 

 

 

 

 

 쿠로오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튀어나온 목젖을 혀로 돌려 핥은 리에프는 이를 세워 쿠로오의 턱 밑을 살살 긁었다. 쿠로오는 하얗게 질린 손을 리에프의 가슴 위에 얹은 채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아직 피가 돌지 않은 사지가 늘어져 움직이기 힘들었다. 쿠로오는 문득 저를 바닥에 눕히는 리에프를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리에프는 드물게 무표정했다. 축 쳐진 손을 당긴 리에프는 그 손바닥에 가만히 입을 맞추더니 입술을 당겨 웃었다. 쿠로오는 문득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쿠로 상이 죽는 건 내 손에서 에요.”

 “…………에프…….”

 "어딜 마음대로 죽으려 들어."

 

 

 

 

 

 목소리가 섬짓했다. 쿠로오는 제 손목을 움켜쥐는 손에 잡히지 않은 손으로 리에프의 팔을 잡았다. 쿠로오가 그 팔을 밀어내기 전에, 잡힌 손목이 먼저 꺾였다. 아아아악-!!! 쿠로오가 발작하듯 발버둥 쳤다. 그럼에도 팔뚝을 붙잡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괴이한 각도로 꺾인 손목을 잡아 다시 돌려놓으며 쿠로오가 한 번 더 비명을 내질렀다. 바들바들 떠는 반대쪽 손을 끌어다 팔을 잡게 한 리에프는 몸을 일으켜 붕대를 가져왔다. 그 사이 눈물에 젖은 뺨을 핥은 리에프는 쿠로오의 손목에 붕대를 감았다. 으스러지는 것 같은 감각에 쿠로오는 신음했다.

 

 

 

 

 

 “또 이러면 다음에는 다리를 부술 거예요.”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의 내용에 쿠로오는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게 굴어요. 쿠로오를 품에 안은 리에프는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면서도 얌전히 제 품에 안겨오는 쿠로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쿠로오의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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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어뜨케. 땡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손아귀 가득 미끈거리는 감촉에 어쩔 줄 모를 뿐이었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냄새와 새빨간 색이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칼이 살을 가르는 느낌, 뼈에 부딪히는 느낌, 뜨뜻미지근한 피가 손등 위로 쏟아지는 느낌 모두 저에겐 희열이 되어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하하하. 터져 나온 웃음을 막지 않고 허벅지까지 두들겨가며 웃어댔다.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어지러운 쾌감이 심장을 간질이고 뇌를 뒤섞어 놓았다. 시체를 얼른 처리해야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리에프는 연신 낄낄거리며 웃다 진정이 되자 미소 띤 얼굴로 시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저가 웃는 사이 식은 피부를 손가락으로 살살 그어가며 만지던 리에프는 축 늘어진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죽일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아저씨다. , 다음부턴 좀 젊은 사람을 죽일까. 미소를 지워낸 리에프는 문득 제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스륵, 고개를 들었다. 멈칫 뒷걸음을 치는 모양새에 리에프는 근육을 긴장시키고, 그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꺄아악!!”

 

 

 

 

 

 그 팔을 붙잡은 리에프는 이마를 맞대며 눈을 번뜩였다. 여자였다. 여자는 죽인 지 좀 오래 됐으니까, 간만에 두탕을 뛰어 볼까 싶었는데. ,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에 리에프는 여자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왠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리에프는 살짝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번뜩거렸던 눈을 가라앉혔다. 익숙하게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 위로 띠운 리에프는 재빠르게 남자를 훑었다. 탄탄한 몸과 일본인 치고 커다란 키가 만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꼭 죽여야 하는데. 여자의 흐느낌을 사이에 둔 적막을 깬 것은 남자였다.

 

 

 

 

 

 “무슨 일이에요?”

 “…… 여자 분과 저와의 비밀?”

 

 

 

 

 

 리에프는 씩 웃으며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둠 속 빛나는 눈동자는 금빛이었다. 아름답다. 리에프는 더 짓궂게 웃으며 그 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여자는 흠칫, 몸을 떨며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남자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확신. 남자는 이 상황이 조금쯤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사실이 그랬다. 자신은 아직 저 여자에게 어떠한 위협이 될 만한 행동도 한 것이 없으니까. 여자를 잡은 남자의 손에 조금쯤 힘이 빠진 순간. 리에프는 손을 뻗어 여자의 목줄기를 덥썩 쥐었다. 이미 사람 좋게 지어보이던 웃음은 싹 지운 채였다. 남자의 눈이 점차 크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리에프는 손에 힘을 주었다. 공포에 질린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 쾌감.

 

 

 우드득-.

 

 

 여자는 목이 꺾인 채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리에프는 남자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것을 보며 웃고는 그 팔을 움켜쥐었다. 생각보다도 몸이 탄탄했다. 남자의 하관을 손으로 감싸며 벽으로 밀어붙인 리에프는 쿵 소리를 내며 머리를 박은 남자가 신음하는 것을 보며 몸을 밀착했다. 찡그린 눈이며 당황스러운 상황에 배어나오는 식은땀에 젖은 목덜미, 탄탄한 허벅지까지 모두 흥분한 자신에겐 너무나 자극적인 것이었다. 리에프는 남자의 입을 막은 제 손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남은 손으로 그 목을 꾹 조였다. 자유로워진 남자의 손이 리에프를 치고 할퀴며 발버둥 쳤지만 곧 남자의 눈은 산소부족에 까뒤집어졌다. 리에프는 남자의 몸에 힘이 전부 빠지는 순간 목을 조르던 손을 놓고 남자를 품에 안았다. 목이 졸리는 탓에 반사적으로 나온 눈물이 남자의 눈가를 적시고, 남자의 얼굴은 온통 붉었다. 리에프는 남자를 품에 단단히 안으며 제 뒤를 돌아보았다. 널브러진 여자의 시체와 골목 구석의 남자 시체가 보였다.

 

 

 

 

 

 “……, 섰는데.”

 

 

 

 

 

 리에프는 어깨를 으쓱, 하고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금방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의 다리가 조금쯤 바닥에 끌렸다.

 

 

 

 

 

 

 

 

 

 

 쿠로오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밀려오는 두통에 다시 눈을 감으며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쿠로오는 머리를 짚으려 손을 움직이려다 퍼뜩 눈을 떴다. 손이 묶여있었다. 발을 움직여 본 쿠로오는 제 발도 묶여있는 것을 깨닫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쿠로오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이 꺼진 공간은 창문조차 없어서 코앞도 보이지 않았다. 쿠로오는 제 기억을 더듬었다. 여자의 비명 소리에 급히 달려갔던 곳엔 은발 머리의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여자를 보호해주다가, 여자가 죽고, 자신은? 쿠로오는 물밀듯 떠오르는 기억들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 코앞에서 번득이던 초록빛 눈동자가 기억이 났다. 쿠로오는 잘게 떨려오는 손에 주먹을 꾹 쥐었다. 곧 문이 열리고 빛이 새어 들어왔다.

 

 

 

 

 

 “, 뭐야. 일어났어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환하게 켜지는 빛에 쿠로오는 눈을 찔끔, 감았다. 간신히 뜬 시야엔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남자가 쿠로오에게 다가왔다. 쿠로오는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가벼운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묶어놓고 나갔다 오길 잘 했네요. 이렇게 빨리 깨어날 줄 몰랐어.”

 “, 뭐야.”

 “, 하이바 리에프. 제 이름이에요. 아까 기억나요?”

 

 

 

 

 

 느긋하게 뻗어진 손이 쿠로오의 머리칼을 살짝 매만졌다. 쿠로오는 고개를 저어 그 손을 털어냈다. 허공에서 손가락을 까닥인 리에프는 씩 웃었다. 쿠로오는 등에 닿는 벽에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쪼그려 앉아 있던 리에프는 저를 노려보는 쿠로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때리거나 한 적은 없으니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저를 노려보는 눈에서는 얕은 공포와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겁에 질린 금색 눈동자라, 생각만 해도 짜릿해지는 기분에 리에프는 다시 손을 뻗어 쿠로오의 뺨을 살짝 쓸어냈다. , 하고 제 손을 쳐내는 손에 눈을 조금 크게 떴던 리에프는 손을 거두며 활짝 웃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리에프는 저를 경계하듯 가슴 앞에 놓인 손목을 움켜쥐어 내리고, 쿠로오의 어깨를 쥐어 바닥에 내팽겨 쳤다. , 하고 바닥에 쓰러진 쿠로오는 부딪친 어깨에서 오는 고통에 신음하기도 전에, 제 바지 버클을 풀어내는 손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쿠로오 씨가 맘에 들었거든요.”

 

 

 

 

 

 휘어진 눈매와는 달리 리에프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순식간에 바지를 반쯤 내린 손이 쿠로오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쑥 들어오는 손가락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며 비명을 내질렀다. 억지로 벌어진 아래에서 열이 올랐다. 바둥거리는 손을 위로 잡아 누른 리에프는 억지로 뻑뻑한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으며 손가락을 벌렸다. , 하고 찢어지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쿠로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더 찢어진 듯 왕복하는 손가락이 수월할 정도로 피가 났다. 리에프는 맘에 들게 손가락이 움직이자 끅끅거리는 쿠로오를 뒤집었다. 무릎께까지 바지를 내린 리에프는 제 성기를 꺼내며 쿠로오의 머리칼을 움켜쥐어 뒤로 꺾었다. 헐떡이는 얼굴이 벌겠다.

 

 

 

 

 

 “맘에 들게 울어 봐요.”

 

 

 

 

 

 그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리에프는 핏방울이 흐르는 구멍에 제 성기를 맞추고 그대로 밀어 넣었다. 아아악!! 투둑, 하며 좁은 구멍이 더 찢어지는 느낌이 들며 쿠로오가 비명을 내질렀다. 리에프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쿠로오의 상의를 위로 걷어내며 마른 허리를 쥐었다. 그만, 끄윽, , ……. 벌써 갈라진 목소리에 리에프는 허리를 숙여 터질 듯 달아오른 귀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허벅지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곧 리에프는 허리를 뒤로 쑥, 뺐다가 퍽 소리가 나게 쳐올렸다. 흐악! 손톱이 부러질 듯 하얗게 질려 바닥을 긁었다. 리에프는 허리를 쳐올리며 비명을 내지르는 쿠로오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체취를 폐부 가득 들이마셨다. 혈향과 섞인 체취는 달콤했다.

 

 

 

 

 

 

 

 

 

 

 쿠로오는 멍하니 반대쪽 벽을 보고 있었다. 창고 비슷한 것이라 생각했던 공간은 단순히 가구가 없는 화장실이 딸린 방이었다. 묶여있던 손목과 발목은 처음 강간을 당한 날 기절했다 일어나보니 풀려있었다. 대신 목에 가죽 초커가 채워져 있었다. 꼭 집을 지키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초커를 끊어 보려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두꺼운 가죽으로 된 초커는 긁힌 자국만 날 뿐 끊어지지 않았다. 연결된 쇠사슬도 똑같았다. 목이 잘리거나, 초커가 끊어지거나, 사슬이 끊어지거나, 사슬이 박힌 벽이 무너지거나 해야 저는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 제일 간단한 것은 제 목이 잘리는 일이었다. 쿠로오는 멍하니 시선을 제 발치로 내렸다. 어제 바닥에 낭자했던 피들은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아마 저가 기절한 사이 리에프가 치웠을 것이었다. 쿠로오는 몸을 웅크려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쿠로오가 입은 옷은 고작 쿠로오에게도 큰 반팔 티 한 장이 전부였다. 바지와 속옷은 필요 없다며 주지 않은 탓이었다. 문득 쿠로오는 제 옷을 확인했다. 잔뜩 튀었던 피가 없는 걸 보니 그 사이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쿠로오는 철컥, 하는 소리에 몸을 굳혔다.

 

 

 

 

 

 “일어나 있었네요, 착해.”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 웃으며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어제완 달리 말끔한 차림이었다. 쿠로오는 문득 제 코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를 맡았다. 어제 저녁으로 먹었던 것을 죄 토해낸 이후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 위가 요동을 쳤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리에프는 쿠로오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활짝 웃었다. 배고프죠, 어제 다 토했잖아요. 쿠로오의 앞에 들고 온 접시를 내려놓은 리에프는 그 앞에 앉아 쿠로오의 손에 포크를 들려주었다. 접시 안에 들은 것은 스테이크였다. 쿠로오는 접시와 리에프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리에프는 손을 뻗어 덜덜 떨리는 쿠로오의 손을 잡아 살짝 당겼다.

 

 

 

 

 

 “얼른 먹어요.”

 

 

 

 

 

 눈꺼풀, , 입술에 차례대로 내려앉는 입술을 가만히 받은 쿠로오는 여전히 떨리는 시선으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잘게 잘려있는 고기를 한 점 찍어 입에 넣은 쿠로오는 천천히 이를 움직여 씹었다. 맛있어요? 나른한 웃음에 쿠로오는 다시 한 점 고기를 입에 넣었다. 쿠로오가 접시를 전부 비울 때 까지 포크를 시선으로 좇던 리에프는 마지막 한 점이 쿠로오의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자 활짝 웃으며 쿠로오의 손에서 포크를 가져갔다. 연이어 내미는 물까지 전부 들이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리에프는 몸을 일으켰다.

 

 

 

 

 

 “역시 어린 여자가 부드럽죠.”

 “……?”

 “다음엔 좀 더 어린애로 잡아 올까요?”

 

 

 

 

 

 쿠로오는 퍼뜩 스치는 어제의 기억에 입을 틀어막았다. 피에 젖어가던 교복 치마와 앳된 비명 소리. 쿠로오는 욱, 하고 올라오는 구역질에 급히 일어나 화장실로 뛰쳐갔다.

 

 

 

 

 

 “우웨에엑-!!”

 “, 다 토하면 어떡해요.”

 

 

 

 

 

 쿠로오는 토악질을 하며 저가 토해내는 토사물을 보았다. 고기. 쿠로오는 더 이상 나오지도 않으면서도 구역질을 계속 했다. 변기를 짚은 손이 벌벌 떨렸다. 맛은 있었어요? 어깨를 안아오는 팔에 쿠로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흐으으. 삼키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리에프는 쿠로오를 변기에서 떨어뜨리고 물을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몸을 돌려 품에 안자 벌벌 떨리는 손이 저를 아등바등 밀어냈다. 리에프는 쿠로오의 턱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눈물을 쏟아내는 눈가를 엄지로 쓸어낸 리에프는 미소 지으며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다음엔 더 맛있게 만들어 올게요, 토하면 안돼요.”

 

 

 

 

 

 흐으윽, 결국 우는 소리를 내며 품으로 기대오는 몸에 리에프는 그 몸을 품에 안았다. 입 헹구고 나가요, 나 섰어. 다정한 듯 속삭이며 리에프는 쿠로오의 허리를 안아 일으켰다. 물을 입에 흘려 넣어주자 끅끅 울면서 물을 뱉어내는 것에 리에프는 뺨에 입을 맞추고 세면대를 잡게 했다. 엉덩이를 간신히 덮은 티를 올리자 바로 드러나는 엉덩이에 리에프는 급히 제 페니스를 꺼내 엉덩이 사이로 슬슬 문지르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제 싼 정액이 아직 안에 있어 윤활제 역할을 했다. 거울을 부여잡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리에프는 쿠로오의 턱을 잡아 올려 거울을 보게 했다. 울음 탓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물 탓에 엉망이었다. 리에프는 등에 상체를 밀착하며 뺨에 줄줄 흐른 눈물을 핥아올렸다.

 

 

 

 

 

 “거울 잘 봐요. 쿠로 상 섹스할 때 표정이 얼마나 섹시한 지 놓치지 말고 봐야 해요.”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에 쿠로오는 거울을 짚은 손을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턱을 잡은 손은 놓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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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로오는 피곤한 눈을 꾹 누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언제 오냐고 재촉을 받기 시작한 것이 2주 전 부터였는데, 저가 바쁘긴 정말 바빴던 모양이었다. 쿠로오는 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가게 안에 홀로 환하게 밝혀져 있는 바가 눈이 부셨다. 쿠로오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가 벌써 저를 발견하고 손을 방방 흔드는 이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전히 가게는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쿠로오는 휘적휘적 걸어 익숙한 제 자리에 앉았다. 늘 저를 위해 비워두는 자리였다. 쿠로오는 저가 자리에 앉자마자 바짝 다가오는 얼굴에 히, 웃어보였다.

 

 

 

 

 

 “-로오!”

 “, 보쿠토. 오랜만.”

 “얼굴 까먹겠어. 보고 싶었어!”

 “나두우. 뽀뽀.”

 

 

 

 

 

 뺨을 톡톡 치니 쪽, 하고 뺨에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쿠로오는 싱긋 웃었다. 늘어지는 제 말투를 눈치 챈 듯 자연스레 오늘은 알코올 빼고-? 하는 말에 쿠로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를 제조하기 시작하는 보쿠토를 나른한 눈으로 보던 쿠로오는 턱을 괴고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한 달 만에 마주한 얼굴이 좋았건만 제 어깨에 돌덩이처럼 쌓인 일 더미가 그렇게 봐주지 않았다. 쿠로오는 가볍게 눈두덩이를 누르며 끄응, 앓았다. 조금만 더 고생을 하면 전보다 훨씬 나을 것이었다. 쿠로오는 제 손목을 당기는 손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에 쪽. 쿠로오는 그 뺨을 잡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충전-. 답지 않게 부리는 어리광에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이 다정했다. 시간만 나면 짧게라도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쿠로오는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보쿠토의 뺨을 놓아주었다. 제 앞으로 밀어지는 잔은 예쁜 빛이었다.

 

 

 

 

 

 “우리 쿠로오 힘들어서 어떡해.”

 “보쿠토 충전 받아서 괜찮아.”

 “일 힘들면 때려 치고 오빠한테 시집와, 잘 해줄게.”

 

 

 

 

 

 그러며 씨익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마주 씩 웃었다. 반쯤 확신으로 한 말이었고, 쿠로오도 웬만하면 그 말에 응해 줄 생각이었다. 친구라는 이름하에 연인보다 깊은 사이. 쿠로오는 이런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음료를 한 모금 머금자 달큰하고 씁쓰름한 맛이 혀를 적셨다. 에너지 드링크 좀 섞었어. 잔을 닦으며 하는 말에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가 외진 곳에 있어서 그렇지 보쿠토의 실력은 꽤 수준급이었다. 좀 더 번화가 쪽으로 가게를 낸다면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었지만 보쿠토는 그러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게가 바쁘면 가끔 찾아오는 제 친구에게 신경 쓸 틈이 없어지니까. 쿠로오는 새삼스레 다른 이와 대화하는 친우의 얼굴을 보았다. 상쾌한 향이 날 것 처럼 호쾌한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 아무것도 못한다.

 

 

 

 

 

 “미안, 말이 좀 길어져서.”

 “괜찮아. 키스할 시간도 없어졌지만 괜찮아.”

 “으아,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갔단 말이야?”

 “바보야.”

 

 

 

 

 

 쿠로오는 손을 뻗어 보쿠토의 코를 툭 치며 웃었다. 보쿠토는 쿠로오의 뺨을 감싸며 눈 밑의 다크써클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묘하게 시원한 느낌에 눈을 감고 있던 쿠로오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가게에 슬몃 눈을 떴다. 저를 보고 있는 보쿠토의 얼굴도 그다지 당황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쿠로오는 보쿠토의 손을 잡아 내리며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 하며 콘서트 같은 곳에서나 들릴 비명이 들려왔다. 쿠로오의 눈이 슬쩍 찡그려지자 보쿠토는 쿠로오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깜빡하고 얘기 안했는데, 요즘 우리 가게에 인기 많은 탑 하나가 오거든.”

 “시끄럽게.”

 “다크써클 생긴 만큼 쿠로오 예민해졌네.”

 “너도 시끄러.”

 

 

 

 

 

 살짝 삐친 듯 하는 말에 보쿠토는 킥킥 웃으며 여태 잡고 있던 뺨을 놓았다. 쿠로오는 음료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에너지 드링크를 섞었다던 음료는 고장 난 기계처럼 뻑뻑한 몸에 기름칠을 해주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곧 가야할 시간이었다. 음료를 조금씩 비워내는 데, 옆 자리의 의자가 덜컥, 빠졌다.

 

 

 

 

 

 “헤에, 보쿠 쨩 애인-?”

 

 

 

 

 

 그렇지 않아도 수려한 눈매를 휘며 웃는 것에 쿠로오는 그 얼굴을 쓱, 훑었다. 퍽 잘생긴 얼굴이었다. 인기 많은 탑이라더니, 그 이유를 조금쯤 알 것 같았다. 쿠로오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턱을 괴었다. 남자가 옆에 앉자 소란스러운 무리가 바로 옆으로 와 웅성대니 머리가 아픈 기분이었다. 곧 저만치에서 무언가를 하던 보쿠토가 다시 돌아와 찡그린 미간을 살살 문질러 펴 주었다. 주름 생겨,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에 쿠로오는 한숨처럼 웃었다. 음료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웅성거리던 소리는 곧 안녕-, 하는 소리와 함께 수그러들었다. 쿠로오는 꽤나 적나라하게 저를 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안녕?”

 

 

 

 

 

 시선이 마주치자 또 휘어지는 눈에 쿠로오는 눈을 깜빡이다 곧 흐응, 웃으며 같이 눈을 휘었다. 안녕. 순간 남자의 입매가 굳어졌다. 곧 보쿠토가 남자가 주문한 음료를 가져오자 쿠로오는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쿠로오, 벌써 가?”

 “, 오늘은 너 보러 온 거. 다음에 더 오래 있다 갈게.”

 “아쉬워라.”

 

 

 

 

 

 쭉 내민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쿠로오는 여태 저를 좇는 초콜릿 빛 눈동자에 다시 한 번 웃어주었다. 다음에 또 보자. 살랑, 흔드는 손에도 남자의 표정은 멍했다. 쿠로오는 들어왔을 때 처럼 휘적휘적 가게를 빠져나갔다. 가게는 들어올 때보다 조금 더 북적거리고, 소란스러웠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가게를 나서는 남자의 등을 끝까지 좇았다. 나른한 눈매와 웃을 때 쓱 올라가는 섹시한 입매에 가슴이 뛰었다. 오이카와는 저와 똑같이 남자의 뒤통수를 우울한 표정으로 좇는 보쿠토를 얼른 돌아보았다.

 

 

 

 

 

 “보쿠 쨩.”

 “으응?”

 “저 사람 누구야? 보쿠 쨩 애인?”

 “……애인은 아닌데……친구?”

 “이름은 뭐야? 나이는? 포지션은?”

 “한 가지 씩만 물어봐! , 마음에 들었어?”

 

 

 

 

 

 씩 웃는 얼굴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 꼬실 거야. 자신만만해 보이는 표정에 보쿠토는 흐응, 웃으며 쉐이커에 얼음과 음료를 담았다. 여태껏 쿠로오에게 들이댔던 남자들을 가만히 속으로 꼽아보던 보쿠토는 다시 저에게 이것저것을 조잘조잘 물어보는 오이카와에게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어차피 마지막은 나인 걸, 위기감은 없었다.

 

 

 

 

 

 “열심히 해봐-.”

 

 

 

 

 

 호탕하게 웃는 얼굴 아래 자신만만함을, 오이카와는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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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회색 하늘 아래 도시 전체가 회색으로 젖어 내렸다. 창가에 이마를 기대어 밖을 내다보다, 내뱉은 숨결에 뿌옇게 서리는 입김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입김 탓에 잠시 보이지 않았던 바깥은 다시 보여도 여전히 우중충한 빛깔이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려 저만치 소파에 앉아있는 무뚝뚝한 뒤통수를 보았다. 완벽한 배구 실력처럼 깔끔을 떨 것 같았건만 머리칼은 어제 저가 흐트러뜨려 놓은 것 그대로 엉망이었다. 오이카와는 완전히 몸을 돌려 창문에 몸을 기대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굳센 목엔 뒷덜미에도 잇자국이 벌겋게 나 있었고 딱 벌어진 어깨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좀 덜 깨물 걸. 문득 든 생각에 오이카와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내가 우시와카 쨩을 왜 생각해 줘야 해? 늘 하는 치기어린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눈을 반쯤 감았다. 차가운 냉기가 창문의 유리를 타고 오이카와의 살갗을 차갑게 식혀냈다. 춥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쯤 오이카와의 시선이 머물러있던 뒤통수가 스륵,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오이카와.”

 

 

 

 

 

 고개는 반쯤 돌린 채 눈동자를 굴려 저를 보는 시선은 마치 매와 같았다. 이 쪽으로 오라는 말을 빙 돌려 말하는 것은 오이키와의 성이 차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저를 보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을 먼저 거둔 것은 우시지마였다. 다시 앞을 보는 뒤통수에 오이카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우시와카 쨩이 뭔데 내 눈을 먼저 피해. 울컥 올라오는 분노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곧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에 오이카와는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제 발치 앞에 선 걸음과 제 입술께를 쓰다듬는 엄지는 다정함이 뚝뚝 묻어났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눈매를 일그러뜨린 채 시선을 들지 않았다.

 

 

 

 

 

 “씹으면 아프지 않은가.”

 “……아파.”

 “이를 세우지 마라.”

 

 

 

 

 

 엄지로 눌러 오이카와의 이에서 입술을 해방시킨 우시지마는 그대로 손을 뗐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무는 대신 이를 악 물었다. 멍청한 우시와카 쨩. 바보. 속으로 욕하면서도 오이카와는 제 어깨를 잡고 창문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그 손에 제 몸을 맡겼다. 등을 쓸어내려 그 냉기를 떨쳐낸 우시지마는 다시 손을 뗐다. 오이카와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게 손을 대지 않으면서 제게서 멀어지지도 않는 우시지마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았다. 여전히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건드리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그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추워. 내뱉듯 읊조리는 소리에 우시지마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는 팔.

 

 

 

 

 

 “안아줘, 바보 우시와카.”

 

 

 

 

 

 그제야 저를 품에 안는 팔에 오이카와는 그 품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저가 그렇게 만들었으면서,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가슴께를 퍽, 쳤다. 우시지마의 턱이 오이카와의 정수리를 꾹 눌렀다.

 

 

 

 

 

 “몸이 차다, 오이카와.”

 “추워.”

 “침대로 갈까.”

 “변태야, 우시와카 쨩?”

 

 

 

 

 

 툴툴거리는 소리에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를 침대 근처로 옮겼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오이카와는 침대 맡에 앉은 우시지마의 팔을 움켜쥐었다. 아무데도 가지 마. 이불 속에서 웅얼대는 소리에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마주 잡아지지 않는 손을 보던 오이카와는 잡았던 손을 놓고 그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그랬다. 경기를 뛰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스쳐 지나가지 않고 꼭 몇 초라도 머물다가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위화감, 그 다음에는 의혹, 의혹은 곧 짜증으로 변모했지만 종내에는 깨달음이었다.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저를 따라다니는 여자아이들의 눈빛에서 보이는 그 따뜻한 감정들이 무뚝뚝한 무표정에서 흘러 넘쳤다. 마치 경기에서 이긴 듯 한 쾌감이 일었다. 그 우시지마가 나를 좋아한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했다.

 

 

 

 

 

 

 

 

 

 

 -우시와카 쨩. 혹시 나 좋아해?

 

 

 

 

 

 평소와 같이 그렇게 부르지 말라 하려 벌어졌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먼저 피한 적 없던 시선이 도르륵, 옆을 향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고 그 목덜미 뒤로 팔을 뻗어 깍지를 낀 채 그 얼굴을 마주했다. 나 봐, 우시와카 쨩. 그제야 다시 마주치는 시선은 따뜻함을 넘어서 뜨거운 감정이 눈동자 안에 엉켜있다. ? 말해봐 우시와카 쨩. 나 좋아해? 한 걸음 다가가 가까워진 얼굴은 조금쯤 일그러진 듯 했다. 좀처럼 나오지 않는 대답에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미 들킨 주제에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깍지를 꼈던 손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저를 보는 시선은 뜨거웠다. 재미없어. 몸을 돌려 한 걸음 걷는 순간, 덥썩 손목을 잡아당기는 힘에 벽에 등을 부딪쳤다.

 

 

 

 

 

 -오이카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팔 사이에 가두어져 올려다보는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귓가에 입김이 닿았다. 좋아한다, 오이카와. 뜨거운 입김이 귀를 간질이고, 가까웠던 몸은 다가왔던 것처럼 천천히 멀어졌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감기지가 않았다. 뺨을 감싸는 손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슬몃 닿아오는 입술의 감촉에 고개를 틀어 피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하지 마, 키스.

 

 

 

 

 

 뺨을 쥐었던 손은 뒤통수로 넘어가 부드럽게 감쌌다. 허리를 안아오는 팔이 굳셌다. 다시 닿는 입술에 그 옷깃을 움켜쥐었다. 뜨거워. 밀려드는 혀에 눈을 감았다. 온통 뜨거웠다.

 

 

 

 

 

 

 

 

 

 

 오이카와는 눈을 떴다. 창문을 두드리던 빗방울은 여전했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몸을 일으켰다. 뒤통수를 느리게 잡아당기는 꿈의 여운에 오이카와는 마른세수를 하도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제 주위를 둘러본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익숙한 뒤통수가 없었다.

 

 

 

 

 

 “우시지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벗은 상체의 체온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우시지마. 다시 한 번 부른 이름에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본 곳엔 고개를 내민 우시지마가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을 감출 수가 없어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였다. 곧 다가온 몸이 앞에 섰다. 어디 안 간다고 했잖아. 칭얼거리는 것처럼 나온 소리에 오이카와는 주먹을 꾹 쥐었다.

 

 

 

 

 

 “우시와카 쨩은 왜 말을…….”

 

 

 

 

 

 오이카와는 이마를 박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를 꾹 껴안는 품이 뜨거웠다. 식었던 살갗에 뜨거운 체온이 따뜻했다.

 

 

 

 

 

 “미안하다.”

 “……바보 우시와카 쨩.”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오이카와는 팔을 들어 그 허리를 안았다. 누가 안아 달래. 자그마하게 툴툴거리는 소리에도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식은 몸이 점차 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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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른 전력 60분 참여

 

 

 

 

 

 

 

 

 

 

 네코마는 봄고 예선에서 탈락했다.

 

 

 모두 한 걸음 더 내딛었고, 하나 더 리시브 했고, 하나 더 스파이크를 날렸지만 결국 경기는 네코마의 패배로 끝이 났다. 속상해 하는 모두를 달랜 것은 그였다. 괜찮아, 너희는 다음이 있잖아. 평소와 똑같이 짓궂게 웃는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평소처럼 그에게 웃어 보일 수 없었다. 우리는 다음이 있지만, 당신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내며 먼저 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을 보았다. 멋있는 척 하기는. 야쿠 상은 그렇게 툭하니 던지며 그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먼저 경기장을 나서는 그의 등을 따라 나섰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떼어 나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의 봄고는 그렇게 끝이 났다.

 

 

 

 

 

 

 

 

 

 

 리에프는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평상 시 같았으면 금방 도달했을 거리를 리에프는 미적거리고 있었다. 붉은 노을에 물든 체육관 벽은 평소와 달리 멀게만 느껴졌다. 리에프는 문 앞에 도착해 그 문을 슬쩍 밀었다. 굳게 잠겨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쉽게 밀려 열리는 문에 리에프는 가만히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캄캄한 체육관 안에 노을빛이 길을 만들어냈다. 리에프는 발을 떼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공이 튀는 소리와 신발이 마찰하는 소리, 급한 숨소리와 서로 주고받는 목소리로 시끄럽던 체육관 안은 고요했다. 리에프는 가방을 내려놓고 공을 하나 집어 들어 바닥에 튕겼다. , 하며 울리는 소리가 체육관 안에 울렸다. 리에프는 다시 걸음을 옮겨 한쪽 벽에 기대앉았다. 둥그런 공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던 리에프는 문득 노을빛을 가리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 뭐야. 하이바 군?”

 “……쿠로오 상.”

 “이야, 하이바 군이랑 같은 생각을 했다니. 자존심 상해.”

 

 

 

 

 

 키득키득 웃으며 체육관 안으로 들어온 쿠로오는 리에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쿠로오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그를 빤히 쳐다보던 리에프는 제 앞에 쿠로오가 앉아 턱을 괼 때 까지고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리에프의 손에 들린 공을 슥 빼낸 쿠로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려 공을 몇 번 튕기는 뒷모습은 여전히 커다랗고, 여전히 굳건했다. 쿠로오는 고개를 돌려 리에프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평소와 같이 짓궂게 웃었다.

 

 

 

 

 

 “리시브 연습하자, 하이바 군.”

 

 

 

 

 

 평소 같았으면 으엑, 하고 질색하는 소리가 나왔을 텐데, 리에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리에프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본 쿠로오는 손가락으로 공을 돌리며 평소에 늘 연습하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기 선 안이 아닌 체육관 한 쪽 구석. 쿠로오는 늘 자신이 서 있던 곳에 서서 천천히 공을 바닥에 튕겼다. 시작한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에 리에프는 리시브 자세를 잡았다.

 

 

 

 

 

 

 

 

 

 

 “후우, 하이바 군 언제 이렇게 리시브 실력이 늘었어?”

 

 

 

 

 

 주르르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낸 쿠로오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리에프는 리시브 자세를 풀고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리시브에 관해서는 거의 처음으로 쿠로오에게 받는 칭찬이었다. 그러나 제 가슴 안에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쿠로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고개만 숙인 채 서 있는 리에프를 빤히 보다 몸을 돌렸다. 벽 한 쪽에 던져 둔 가방 안에서 물병과 수건을 꺼낸 쿠로오는 다시 리에프에게 다가갔다. 저가 먼저 물을 쭉 삼키며 쿠로오는 리에프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덮었다. 바닥으로 뚝뚝,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쿠로오는 입에서 물병을 떼며 씩 웃었다.

 

 

 

 

 

 “지금 우는 거야, 하이바 군?”

 

 

 

 

 

 채 가려지지 않았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쿠로오는 처음 입학했을 때 보다 훨씬 커진 리에프를 아래서 올려다보았다.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며 눈을 질끈 감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에 쿠로오는 물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만히 그 목을 끌어안았다. 늘 이 체육관에서 보았던 빨간 저지가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던 리에프는 제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는 손에 결국 저를 안은 몸을 마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리에프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끄윽, …… 쿠로오 상이랑, 계속 경기하고 싶어요……. 흐윽…….”

 “하이바 군은 금방 나보다 잘하게 될 거야. 지금도 리시브를 이만큼 잘하게 됐잖아.”

 “선배들 없이, , 어떻게 해요…….”

 “1학년들도 새로 들어 올 거고, 우리의 뇌인 켄마도 남아 있잖아. 걱정하지 마.”

 “쿠로오 상…….”

 

 

 

 

 

 제 우상은 쿠로오 상 뿐이에요. 엉엉 우는 소리 사이로 뱉어지는 말에 쿠로오는 그 커다란 등을 쓸어내렸다. 그거 고맙네. 웃음 섞인 낮은 목소리에 리에프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깨가 축축이 젖어들었지만 쿠로오는 제 어깨에 묻은 얼굴을 떼어내지 않았다. 점차 어두워지는 체육관 안은 리에프의 울음소리만 메아리쳤다.

 

 

 네코마의 봄고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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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이 더럽게 나쁜 날이었다. 불길한 기분에 눈을 떠보니 원래 일어날 시간보다 훨씬 지나있었고, 타야 할 버스가 오지 않아 급히 택시를 잡아타자마자 택시 뒤로 버스가 왔고, 지각한 강의에 들어오자마자 강의 자료를 놓고 온 것이 생각이 났다. 이렇게도 운 나쁜 날이 있을까. 오늘 같은 날은 집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 누가 술 쏜대! 올 거지? 집에 처박혀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단박에 사라지고 오늘 같은 날은 술 마시고 풀어야지, 하는 맘이 들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술집으로 가서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했던 것이 기억났다. 얼굴이 뜨거운 채로 술을 들이키다 그 자리에 익숙한 얼굴이 끼어 있어 그 옆에 앉아 아는 척을 했던 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일단은.

 

 

 쿠로오는 제 몸을 더 단단히 끌어안는 팔에 끄응 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숙취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속이 뒤집혀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쓰렸다. 마치 무언가가 억지로 집어넣어졌던 것처럼.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제 몸뚱이를 끌어안는 팔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여자는 아니었다. 저가 이마를 기댄 가슴팍은 절벽에 가까운 여자도 아닌 단단한 남자의 가슴팍이었다. 나 어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기억을 더듬던 쿠로오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은 벗은 남자의 가슴팍이었다. 그것도 몸이 엄청 좋은. 쿠로오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어제 제 기억이 맞다면, 이 가슴팍은. 쿠로오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 진짜 미쳤다.”

 

 

 

 

 

 어제 술자리에서 보았던 익숙한 얼굴의 주인이 여기 있었다. 이마를 반쯤 덮은 짧은 머리칼과 남자다운 눈썹, 굳센 턱까지. 저를 끌어안은 이 남자는 그러니까, 대학 동기인 우시지마였다. 쿠로오는 그 품에서 벗어나려 살짝 다리를 움직였다가 퍼뜩 몸을 굳혔다. 허리가 커다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적나라한 그 아픔에 쿠로오는 울고 싶어졌다. 이 상황을 빨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떠올랐다. 남자랑 잔 것도 충격인데, 그것도 모자라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기였다. 쿠로오는 허리의 고통을 꾹 참고 잠에 빠진 얼굴을 감시하듯 보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싶은 그 때 감겨있던 눈이 방금 전 까지 잤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스르륵, 뜨였다.

 

 

 

 

 

 “…….”

 “…….”

 

 

 

 

 

 쿠로오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 얼굴을 본 채 굳었다. 말짱히 뜨인 눈은 몇 번 깜빡이더니 곧 시선을 조금 내렸다. 쿠로오는 그제야 제 벗은 몸이 이불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슬쩍 이불을 당겨 몸을 가렸다. 이게 꼭 부끄럼을 타는 여자 같아 기분이 상하는데, 무표정한 얼굴은 쿠로오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말짱한 얼굴과는 달리 눌린 머리가 우스웠지만 그 등에 한가득 난 손톱자국에 쿠로오는 시선을 돌렸다. 진짜 울고 싶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쓱쓱, 뻗친 뒷머리를 쓸어내린 우시지마는 쿠로오를 돌아보았다. 목과 이불 아래 드러난 어깨선엔 벌건 키스마크와 잇자국이 널려있었다. 우시지마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벗은 옷가지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침대 시트는 한껏 흐트러져 엉망이었다. 우시지마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어제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원치 않는 술자리에 앉아있었다. 자주 좀 보자며 누군가가 계속 술을 따라줬고, 술 경험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주량이 꽤 세다 생각했던 자신은 그 술을 계속 받아 마셨다. 뜨뜻하게 양 볼이 달아올랐을 때 즈음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아는 척을 했었다. 안녕, 우시와카 군. 발갛게 뺨이 달아올라 웃으며 저에게 하는 말에 저는 무어라 대답했었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며 이름을 가르쳐 줬던 것 같다. 그리고 서로에게 술을 따라주고, 술잔을 맞부딪힌 후부터 기억이 없었다. 아니, 사실 문득문득 기억이 났다. 우시지마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술이 센 타입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뒤늦게 훅 올라오는 타입이었나 보다.

 

 

 

 

 

 “저기, 우시와카 군?”

 “……?”

 “, 일단 옷 좀 입을까.”

 

 

 

 

 

 어색하게 뱉는 말에 우시지마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거였지만 속옷까지 전부 벗은 채였다. 우시지마는 몸을 일으켜 제 속옷을 주워들었다. 찝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우시지마를 보며 쿠로오는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았다. 옷을 입자고는 했지만 저릿저릿한 허리에 꼼짝도 할 수가 없어 쿠로오는 그저 우시지마가 옷을 입는 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바지까지 입은 우시지마는 다시 침대에 앉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쿠로오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우시와카 군, 아파, 물지 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아읏, 키스, 우시지마…….

 -내 이름이 뭐라고 했지, 테츠로?

 -후읏, 와카토시……, 거기…….

 -그렇게 불러라.

 

 

 

 

 

 쿠로오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얼른 이불에 파묻었다. 진짜 미쳤다. 쿠로오는 어제 제 위에서 달아오른 얼굴로, 반쯤 풀린 눈으로 저를 몰아붙이던 우시지마와 그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헐떡이던 자신의 기억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둘 다 술에 취해 미쳤었던 거다.

 

 

 

 

 

 “테츠로.”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줬음 하는데, 우시지마 군…….”

 “어제는 아무 말 하지 않지 않았나.”

 “, 어제는 취했었다고!”

 

 

 

 

 

 쿠로오는 당황해 얼떨결에 소리를 지르고 찌잉 울리는 허리에 끄응 앓으며 천장을 보았다. 이게 진짜 무슨 꼴이야. 제 반응에 침대에 출렁인다, 싶더니 팔뚝에 따끈한 열기를 담은 커다란 손이 닿아왔다. 쿠로오는 흠칫, 놀라며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입술이 부르터있었다. 쿠로오는 그 얼굴에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우시지마는 발갛게 부어오른 쿠로오의 눈가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댔다. 쓰라린 지 움찔, 눈을 감는 것에 우시지마는 쿠로오가 꽁꽁 덮은 이불을 재꼈다. 이불을 잡으려 허우적대는 반대쪽 팔 또한 잡은 우시지마는 울긋불긋한 상체를 내려다보았다. 지독히도 물어 놨다, 싶었다. 제 술버릇이 무는 건가 생각 될 정도로. 우시지마는 벌겋게 물든 쿠로오의 눈 위에 입술을 누르고 살짝 핥았다. , 하며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느껴졌다. 혀끝에 채 닦아내지 못한 소금기가 맴돌았다.

 

 

 

 

 

 “우시지마 군, 그만…….”

 “어제 이름을 가르쳐 줬을 텐데.”

 “우리 그 정도로 친하진 않…….”

 “섹스까지 했는데 어떻게 해야 더 친해지지?”

 

 

 

 

 

 적나라한 단에 쿠로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우시지마는 눈꺼풀에 누른 입술을 떼고 쿠로오를 내려다보았다. 성애의 흔적이 난잡한 몸은 색정적이었다. 우시지마는 어제의 자신이 어째서 이 남자와 잤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쿠로오는 잡힌 손목이 침대에 눌리는 것을 느끼며 우시지마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움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쿠로오는 다시 그 얼굴이 내려와 뭉근하게 입술에 문질러지는 감촉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 어제 잔뜩 눌린 탓에 손목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밀어내기도 마뜩찮았다. 입 안으로 들어오진 않고 몇 번이고 입술을 핥던 혀는 곧 떨어져 다시 멀어졌다.

 

 

 

 

 

 “책임지겠다.”

 “……? ?”

 “처음이지 않았나.”

 “, 그건……!”

 “내가 책임지겠다.”

 “하아, 우시지마 군…….”

 “이름을 부르라 했다, 테츠로.”

 

 

 

 

 

 쿠로오는 제 뺨에 쪽, 하고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에 으으, 하고 진저리를 쳤다. 곧 몸을 일으킨 우시지마는 바닥에 널브러진 쿠로오의 옷가지를 주워 와 쿠로오의 이불을 완전히 걷어냈다. ! 하고 소리를 지르는 쿠로오에게, 허리 아프지 않나 입혀주겠다. 하며 태연스레 쿠로오의 다리를 붙잡아 올리던 우시지마는 그대로 멈췄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멀건 액이 주륵, 흘렀다. 중요 부위는 잽싸게 가렸던 쿠로오는 더 이상 얼굴이 달아오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깜빡이던 우시지마는 몸을 일으켜 서랍을 뒤지더니 구비되어 있던 물티슈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다시 발목을 붙잡는 손에 쿠로오는 질색을 했다.

 

 

 

 

 

 “내가 할게, 내가!”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대충 닦기라도 할 거니까! 내가 할게!”

 “다음부턴 안에 하지 않겠다.”

 

 

 

 

 

 쿠로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우시지마는 쿠로오의 다리를 벌리며 물티슈로 흐른 것을 살살 닦기 시작했다. 진이 빠진 쿠로오는 그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 손길을 받았다. 꽤나 조심스런 손길에 한숨을 내쉬던 쿠로오는 우시지마의 말을 곱씹었다. 다음?

 

 

 

 

 

 “저기, 우시지마 군?”

 “…….”

 “저기?”

 “…….”

 “하아…… 와카토시?”

 “왜 그러지, 테츠로?”

 “저기, 다음엔 안에 안 한다고……?”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았나.”

 “우시…… 아니, 와카토시. 우선 나는 여자도 아니고, 어제 잔 건 그냥 하루 실수 한 거라고 생각…….”

 “너와 사귀고 싶다, 테츠로.”

 

 

 

 

 

 대뜸 던져진 돌직구에 쿠로오는 멍하니 우시지마의 얼굴을 보았다. 꽤나 정성들여 아래를 닦던 우시지마는 쿠로오의 얼굴을 보았다. 쿠로오는 눈을 깜빡이다 그대로 대자로 뻗었다. 자 고집을 꺾을 힘도, 자신도 없었다. 쿠로오는 제 발목을 잡아오는 손에 발목을 내밀어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맘대로 하십쇼…….”

 

 

 

 

 

 힘 빠진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쿠로오의 발목을 놓고 물티슈를 휴지통에 버린 뒤 쿠로오의 옆에 앉아 그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데려다 주겠다. 퍽 다정하게 이마를 쓸어주는 손에 쿠로오는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술이 떡이 되도록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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