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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티넬 버스 AU










 오이카와 토오루는 파트너를 잃었다.



 그 말은 오이카와의 등 뒤를 끈덕지게 쫓아다녔다. 이 바닥에서 파트너를 잃는 일은 흔한 일이었지만 오이카와에게만 그 말이 졸졸 따라다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이카와는 후천적 센티넬이었다.

 




















 소꿉친구였던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센티넬로 센터에 오게 된 날, 오이카와 또한 이와이즈미의 가이드로서 센터로 함께 왔다. 운명인지 아니면 형제처럼 같이 자란 탓인지 둘의 상성은 꽤나 잘 맞는 편이었고, 이와이즈미가 뛰어난 센티넬임에도 어릴 적에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옆에 늘 가이딩을 해주는 오이카와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둘은 낯선 센터에 들어왔어도 나름대로 잘 적응을 해냈다. 가이드임에도 오이카와는 신체적 능력이 좋았고, 이와이즈미 또한 꽤 능력이 좋은 상급 센티넬이었다.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둘의 콤비는 센터 내에서 꽤 유명해졌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둘의 실력은 뛰어 넘을 사람이 몇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랬었다.



 오이카와는 눈 쪽으로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빛을 가렸다. 얼마 만에 햇빛을 보며 눈을 뜨는 건지 몰랐다. 오이카와는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지난밤의 지독히 혼란스러웠던 꿈이 뇌리에 남아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깜빡이던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늘 깔끔하게 세팅되어 있던 머리칼은 자고 일어난 탓에 엉망이었다. 터덜터덜 힘이 빠진 걸음걸이로 욕실로 들어선 오이카와는 칫솔을 집어 들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몇 달 동안 쉬는 날 없이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탓인지 볼 살이 쑥 들어갔다. 오이카와 씨 잘생긴 얼굴 다 망가졌네. 뺨을 쓸며 그런 생각을 하던 오이카와는 칫솔에 치약을 짜며 어깨를 한 번 돌렸다. 거울 속 벗은 상체 여기저기 상처와 멍이 들어있었다. 이제 몸을 좀 사려야하나. 칫솔질을 하며 오이카와는 상처에서 눈을 뗐다. 오랜만의 휴가였다.



 오이카와는 그 날 이후로 가이드를 그만두었다. 이와이즈미 만의 가이드였지만 급할 땐 다른 센티넬들에게 가이딩을 해줬었던 것들을 모두 그만두고 오이카와는 센티넬의 임무만 수행했다. 센터 측에서는 가이드의 수가 적었기에 오이카와가 가이드를 계속해줬으면 싶은 기색을 내비췄지만, 뛰어난 센티넬을 잃은 후 새로 나타난 센티넬이 그 자리를 채워주게 되었으니 오이카와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일에 몰두하며 모든 잡생각들을 떨쳐냈다. 그렇게 지낸 생활이 몇 달째였다.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탓인지 오이카와의 임무수행 효율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오이카와에겐 강제로 몇 주의 휴가가 주어졌다.

 


 필요 없는데 말이지. 오이카와는 머리를 만지려다 말고 모자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훈련장이나 다녀올까 싶었다. 아무리 기본 신체 능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갑작스레 얻게 된 센티넬의 능력에 금방 익숙해지지는 않았고, 그것을 익힐 시간도 없이 임무를 수행하러 뛰어다녔기 때문에 연습을 할 틈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그 힘을 다룰 연습을 할까 싶었다. 센터에 처음 들어왔을 땐 밥 먹듯 드나들던 곳이었건만 오지 않은 지 꽤나 되었다. 오이카와는 기억보다 좀 더 닳은 것 같은 문을 조금 들여다보다 문고리를 잡았다.



 콰앙-!!



 꽤나 커다란 소리였다. 비명 소리 같은 것은 나지 않았으니 사람이 다친 것은 아닐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문고리를 돌려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씨발, 조심 해야지 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꽤나 거센 소리였기에 크게 한 소리 듣겠구나, 했지만 의외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긴장한 목소리가 아닌 되래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큰 소리를 낸 것 치고 주변은 깨끗했고,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이 보고 있는 남자 또한 멀쩡하게 서 있었다. 비죽비죽, 머리칼이 엉망으로 위로 솟아있었다. 남자의 손이 허공을 움키자 저만치에 있던 캔이 콰직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우그러들었다. 손가락이 휙, 위로 그어지자 캔은 위로 솟아오르고, 남자의 손끝을 따라 그대로 통 안으로 쏙 들어갔다. 섬세한 작업도 아님에도 남자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쿠로오!”

 “네네, 갑니다.”






 한 쪽에서 훈련장 담당자가 부르고 나서야 남자는 어깨를 돌려가며 자리를 떠났다.






 “뭐야, 오이카와냐?”






 오이카와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훈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욕설을 하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싶었더니, 일 년 전 까지만 해도 저와 임무를 수행하던 나오이였다. 임무 수행 중에 다리를 다쳐 한동안 못 봤었는데, 재활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나오이에게 다가갔다.






 “마나 짱 오랜만이에요.”

 “그 여자애 같은 호칭은 집어 치우라니까. 그나저나 네가 여기 웬일이냐? 임무 수행 중인 거 아니었어?”

 “요즘 빡세게 굴러다녔더니 효율 떨어진다고 휴가 나왔죠.”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근데 온 곳이 훈련장이냐?”

 “오이카와 씨는 부지런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씩 웃자 상대도 크게 묻지 않고 따라 웃었다. 다른 무언가를 말하려던 오이카와는 문득 눈에 걸리는 것에 시선을 돌렸다. 벽에 커다랗게 무언가가 부딪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생긴 자국에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였다. 오래 된 자국은 아니었다. 마치, 방금 생긴 것 같은, 날카로운 균열이 마치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저거 아까 새로 들어온 놈이 만든 거야.”

 “새로?”

 “어, 쿠로오 테츠로 라고. 몇 달 전에 들어온 놈인데, 능력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서 실전에 투입 안 되고 훈련장에 내내 처박혀있다.”

 “헤에-, 저렇게 벽을 다 부숴놨는데?”

 “힘이 강하긴 한데 섬세하지 못하거든. 그래서 등급도 낮다. B- 급.”






 오이카와는 아까 고작 우그러진 캔 하나를 옮기느라 미간을 잔뜩 찌푸렸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엉망진창으로 뻗쳐있던 검은 머리칼이 어렴풋이 머릿속 구석에 처박아 둔 기억을 끄집어내려 했다. 오이카와는 모자를 벗어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다시 모자를 눌러 썼다. 느물느물 스며나오는 기억은 머리칼을 빗어 넘긴 손끝에서 툭, 떨어져 나갔다.





















 “휴가라면서어-!”






 오이카와는 깔끔하게 세팅한 머리칼을 헝클이며 성큼성큼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휴가라고 주어진 시간이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제 자잘한 생채기들이 나아가고 멍도 슬슬 빠질 즈음이라 훈련장에 처박혀만 있지 말고 간만에 산책도 하고 쇼핑도 할까 계획을 하던 도중 불쑥 날아온 서류는 당장 현장에 돌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늘었는지 내내 훈련장에서 봤던 나오이도 어제부터 못 봤다. 아직 재활치료 중인 사람을 그렇게 바로 투입시켜도 되나 싶었건만, 이렇게 본인들이 먼저 휴가를 내준 저까지 불러들였다. 오이카와는 혀를 차며 복도를 걸었다. 며칠 새 눈에 익은 문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 서툴다는 남자도 첫 날과 둘째 날 본 이후 보지 못했었다. 저가 알기로 훈련장은 하나뿐이니 남자도 현장에 투입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함부로 쓰다 난리나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던 오이카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그래, 그 난리가 나기 전에 어서 가야했다.



 이동 전담 센티넬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오이카와는 저를 이동시켜 준 이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곤 걸음을 옮겼다. 아직 현장 근처에도 못 갔음에도 쾅쾅거리는 폭발음이 여기까지 들렸다. 오이카와는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어 두었던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몇 달 째 버릇을 들이기 위해 한 행동은 다행스럽게도 금방 손에 익었다. 장갑이 완전히 손에 끼워진 것을 확인 한 오이카와는 걸음을 빠르게 했다. 펑, 펑, 터지는 소리에 그치지 않고 진동과 공기의 흐름까지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심장에 두근두근, 강하게 뛰며 가슴의 중앙부터 평소보다 온도가 높은 혈액이 몸에 돌기 시작했다. 탁, 타악, 가볍게 자리에서 박차고 허공으로 떠오를 때마다 바닥이 움푹움푹 패어들었다. 거의 다 다가와 갈 때 즈음, 할 수 있는 대로 가장 힘껏 뛰어오른 오이카와는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쾅, 소리와 함께 한쪽에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이야아-, 화려하게도 해 놓으셨네, 들!”






 땅으로 착지할 자리를 찾던 오이카와는 방금 폭발이 일어났던 자리의 먼지구름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심해봐야 버섯모양 정도로 피어올라야 했던 것은 회오리처럼 뭔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돌고 있었다. 아, 불길한데. 오이카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아래로 내려섰다.






 “오이카와!!”

 “마나 짱!”

 “저기, 저기 좀 가봐!”

 “에?”






 먼지 폭풍이 휘날리는 곳을 가리키는 것에 나오이 쪽으로 향하던 오이카와는 발의 방향을 바꿔 발을 떼었다. 싸한 느낌이 휘날리는 바람에 섞여 느껴졌다. 아. 오이카와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고 살갗이 따끔거렸다. 엄청난 출력이었다. 먼지 폭풍 속 까만 머리칼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저거 그 신입 놈이야.”

 “누구?”

 “거 왜 지난주에 봤던 놈! 아직 훈련이 덜 됐다고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급하다고 그냥 투입시켰더니 컨트롤 못하고 능력 팍팍 쓰다가 지금 저 꼴이다.”

 “폭주야? 싫다아!”

 “중요한 건 지금 여기 저 새끼 가이딩 해줄 만큼 능력 좋은 가이드가 없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파트너도 없고, 컨트롤이 미숙해서 그렇지 출력은 센터 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좋으니까.”






 쾅, 또 한 번의 폭발음이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훅 밀려오는 힘의 폭풍에 잠시 몸을 숙였다 그 먼지 폭풍 속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서 있을 뿐이었건만, 그 주변으로 모래며 파편들이 빠르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남자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폭풍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문득 새빨갛게 물들었던 눈이 뇌리를 스쳤다. 오이카와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조금은 뻣뻣한 가죽의 촉감이 느껴졌다. 콰앙-, 또 한 번 남자의 힘에 의해 바닥이 움푹, 패였다. 흔들, 남자의 고개가 흔들리며 돌아갔다. 빛을 잃은 호박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했다. 이미 한 쪽 눈알이 시뻘겋게 물들어있었다. 주륵, 남자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너 가이드였지.”






 옆에서 툭 튀어나온 말에 오이카와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센티넬이 폭주하는 것은 센터 내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본 것만 해도 여러 번이었다. 가죽장갑 안의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너 꽤 등급도 높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 더 이상의 가이딩은 안 해요.”

 “왜? 센티넬 되면서 가이딩 능력은 잃어버렸냐?”






 오이카와는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센티넬들은 저만치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센티넬과 다른 색의 옷을 입은 가이드들을 눈으로 훑어가며 찾았지만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이 목구멍 끝에서 넘실댔다. 가이드. 자신이 아닌 가이드. 그리고, 폭주를 멈추고 죽지 않는 센티넬.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탁. 팔이 붙잡혔다. 그 갑작스러움에 놀라기 무섭게 장갑이 벗겨지고, 그대로 손이 잡혔다. 오이카와는 화들짝 놀라 그 손을 뿌리쳤다. 손에 나오이의 체온이 느릿하게 들러붙었다 금세 식었다. 제 앞의 얼굴 또한 제 손의 체온처럼 차게 식어있었다.






 “그대로잖아.”

 “아니……,”

 “넌 지금 네 능력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도 손 놓고 죽어가는 걸 보기만 하겠다는 거냐?”






 늑골이 폐를 압박하듯 가슴이 뻐근해져왔다. 심장이 마구 뛰어대는 게 느껴졌다. 센티넬로 각성한 이후 예민하진 청각에 바람 소리에 섞여 컥, 하고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보니 남자의 입에서 거멓게 죽은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 나는,”






 실핏줄이 모두 터져 벌겋던 눈과 코와 입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던 피, 제 몸을 무수히 두드리던 파편들, 그 앞에서 제 몸이 전부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열기에 잡혀 무능했던 자신.



 ‘이, 이와…….’



 그 이름을 부르려 입을 벌려도 성대가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핏줄 온통 두드러졌던 살갗들.






 “이 자식아, 네가 고집부리자고 여기 일대 초토화 만들 거야? 쟤 죽여 버릴 거냐고!”






 오이카와는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피가 어느새 줄줄 흐르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입을 다물 수도 없이 피가 콸콸 쏟아지겠지. 오이카와는 입술을 콰득, 씹었다.






 “마나 짱, 킨다이치를 불러줘요! 최대한 빨리!”






 그리고 그 모래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총알 마냥 몸에 쏟아지는 파편을 뚫고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오이카와는 남자의 목을 콱, 쥐었다. 까만 머리칼이 제 친우와 똑같았다. 남자의 손이 움직이기 전에, 오이카와는 남자의 목을 확 당겨 피가 쏟아지는 남자의 입술을 물었다. 짜고 비릿한 액체가 입 안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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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톡회에서 드렸던 앜쿨 뒷내용....










 와이셔츠가 젖어들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쿠로오는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숨통이 죄여드는 것 같았다. 완벽히 벗어났다 생각했었고, 며칠간은 확실히 그랬었다. 놈이 분명 저를 찾아낼 것이란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젖은 바지가 다리에 감겨들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빠르게 걷기가 힘이 들었다. 어느새 꽤나 길어진 머리칼이 젖은 탓에 축 늘어져 시야를 가렸다. 쿠로오는 씹어뱉듯 욕설을 토해내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잔뜩 물이 찬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 든 쿠로오는 홀더를 누르려다 그대로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퐁당, 경쾌하기도 한 소리를 내며 휴대전화는 그대로 고여 있던 물웅덩이에 빠져 버렸다.






 “아-, 씨-발.”






 어느새 입에 붙은 욕을 뱉어내며 휴대전화를 주우려 허리를 숙인 쿠로오는 제 앞에 턱, 서는 구두에 눈을 깜빡였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갈색의 구두는 흙과 빗물에 잔뜩 더럽혀져 있었다. 물웅덩이 속에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음에도, 쿠로오는 허리를 펴지 못했다. 온통 빗소리만 주변에 가득했다.






 “고개 언제 들 겁니까?”






 반듯하게 서 있던 구두가 삐딱하게 움직여 마치 짝 다리를 짚은 모양새를 했다. 쿠로오는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구두 끝부터 시선을 들어올렸다. 더러운 구두에 비해 입고 있는 정장 바지는 바짓단이 조금 젖은 것만 제외하면 퍽 깔끔했다. 그와 상반되게 빗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는 자신이 웃겼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손끝이 쥐고 있던 우산을 기울였다. 저가 봐도 하얗게 질린 손으로, 쿠로오는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이미 다 젖었어.”

 “알아요.”

 “너나 써.”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쿠로오는 다시 빗속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빗방울이 연신 몸 여기저기를 두드리며 체온을 빼앗아갔다. 쿠로오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 더 기울여지던 우산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이번엔 걸음이 움직였다. 성큼, 제 쪽으로 다가오는 걸음에 쿠로오는 똑같은 보폭으로 뒤로 물러섰다. 찰박, 찰박, 걸음이 움직일 때마다 좁은 골목에 발자국 소리만 메아리쳤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뒷걸음질을 치던 쿠로오는 등 뒤로 선뜻한 감촉에 닿아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등이 벽에 닿았다. 등 뒤의 벽을 흘깃, 한 번 본 쿠로오는 다시 시선을 제 앞에 두었다. 우산으로 얼굴이 반쯤 가려진 탓에 그 눈이 보이지 않았다. 자박자박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우산이 슥, 위로 들렸다. 푸른 눈이 마주했다. 빗방울이 더 이상 속눈썹을 두드리지 않았고, 우산 속엔 단 둘 뿐이었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하실 생각이세요?”

 “너 때려 칠 때까지.”

 “인내심 대결 같은 걸 하시자는 거면 저는 좋아요.”






 이런 거 자신 있거든요. 고개를 까닥, 옆으로 기울이는 것을 보며 쿠로오는 비를 맞아 다시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단 하나의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단박에 목덜미든 옆구리든 물어뜯길 것만 같았다. 쓱, 손이 제 앞으로 내밀어졌다. 빗물에 퉁퉁 불어 퍼렇게 보일 지경인 제 손과는 전혀 다르게 멀끔한 손을 보자니 여러 감정이 뇌리에 엉겨 붙었다. 입술만 꾹 깨물고 있자 내밀어진 손은 재촉이라도 하듯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쿠로오는 슬쩍 눈을 굴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안 가.”

 “왜요?”

 “너랑 안 가.”






 허공에서 흔들거리던 손이 내려갔다. 심장이 쿵쿵, 귀 옆에 뛰는 것만 같았다. 고작 그 말 몇 마디 했다고 불안함에 그 손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제가 싫었음에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 몇 달 새에 길들여진 몸이 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인가. 볼 안 쪽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손이 떨리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낸 쿠로오는 제 뺨에 닿아오는 것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뺨이 차요.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매끄럽게도 흘러나왔다. 전 같았으면 그저 그 손에 뺨을 기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쿠로오는 고개를 저어 그 손을 떼어냈다. 말끔했던 손이 제 뺨에 있던 물기에 젖어있었다. 손이 툭, 떨어지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곧 다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네코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한숨과 함께 툭 튀어나온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쿠로오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눈만 깜빡였다.






 “누구도 반기지 않을 거 아시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고집부리세요.”

 “……고집?”

 “현실을 보세요. 자꾸 헛짓 하지 마시고.”

 “그래서 너랑 안 가겠다는 거야.”






 현실을 보라며. 쿠로오는 입술을 꽉 깨물고 제 앞에 있는 이의 어깨를 확 밀쳤다. 그 말끔한 몸이 비틀거리는 사이 쿠로오는 그 옆을 지나쳤다. 성큼성큼, 자신이 뒷걸음질을 치며 걸어왔던 길을 단숨에 지나친 쿠로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머리로 열이 몰려 귀끝이 뜨거운 것도 같았다. 골목을 막 벗어나려는 찰나, 손목이 덥석 잡혀 몸이 뒤로 끌려갔다.






 “놔, 이 새끼야!”

 “일단 여기서는 할 말이 아니니까요, 돌아가서 얘기해요.”

 “내가 어디로 돌아ㄱ……!”






 어깨를 가볍게 쥔 손이 몸을 앞으로 당기며 무릎이 쿠로오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컥, 소리만 간신히 낸 쿠로오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고,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쓰러지는 몸을 가뿐하게 품에 안았다.






 “차.”

 “네.”






 골목 바깥쪽에 있던 남자가 차를 준비시킬 동안, 말끔한 손이 쿠로오의 젖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차가워. 하얗게 질린 살갗을 훑던 눈은 다시 앞을 향했다. 지익, 바닥에 구두가 끌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준비는 몇 달이나 걸렸다. 계획을 세우고, 거취 할 곳을 찾고, 이용할 돈과 이동수단까지 모두 정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에 몇 달이나. 그럼에도 그는 제 노력을 전부 비웃듯 고작 며칠 만에 저를 찾아냈다.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출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해야 하나.



 쿠로오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익숙한 방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돌아왔다. 돌아왔다 말하기도 싫지만. 쿠로오는 욱신거리는 제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몸 여기저기를 움직여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기절하기 전 복부를 맞은 거 말고는 통증이 있는 부위가 없었다. 단순히 씻기고 옷만 갈아입힌 채 방에 놔둔 모양이었다. 쿠로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을 깜빡였다. 무거운 발목을 내려다보자 굵직한 족쇄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잠이 아닌 기절을 했던 탓인지 머리칼이 축 쳐져 시야를 가렸다. 쿠로오는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걸을 때마다 복부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는 건 익숙했다. 저가 깨고 나갔던 창문은 멀쩡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가볍게 유리를 두드리자 둔탁한 촉감이 느껴졌다. 유리의 재질을 바꿨다. 좁은 우리 안에 갇힌 햄스터가 된 기분이었다.






 “일어나셨어요?”






 뒤에서 말을 걸어왔지만 쿠로오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달칵,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가 나고 인기척이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입으로 가져갔다. 초조하게 입술을 뜯고 있자 등 뒤에서 손이 뻗어져 나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깨에 턱이 걸쳐진 듯 조금은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익숙한 체취가 코끝을 맴돌았다. 투둑, 손끝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흘깃, 손을 내려다보자 벌겋게 피가 묻어났다.






 “또 입술 물어뜯었죠.”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성큼 다가와 제 손을 채갔다. 피가 묻은 손끝을 핥아내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피는 전부 지워졌을 텐데도 제 손가락을 사탕이라도 녹이듯 녹진하게 핥는 것에 쿠로오는 손에 힘을 주어 잡힌 손을 빼냈다. 축축한 손가락 끝을 바짓단에 문지르기 무섭게 턱이 잡혀 뒤로 돌아갔다. 미적지근한 혀가 입술을 핥아냈다. 흠칫, 몸을 뒤로 뺀 것이 무색하게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쉽게 풀어졌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런 행동들뿐이었다. 그 사이에 틈은 없었다. 그게 더. 쿠로오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려다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아냈다. 혀끝에 아릿한 쇠 맛이 퍼져나갔다. 쿠로오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접시를 한 번, 그 옆에 서서 저를 보고 있는 남자를 한 번 보곤 걸음을 떼었다. 무작정 남자를 거절하는 것은 남자에게도, 저에게도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쿠로오는 침대 위에 앉아 남자가 내미는 것에 입을 벌렸다.






 “멍이 좀 크게 들긴 했는데, 장기에 문제가 있진 않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음식은 부드러운 걸로 준비했어요.”






 입에 맞으세요? 저를 보는 시선에도 쿠로오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다시 음식이 입 앞에 놓여, 쿠로오는 다시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음식을 덜어내는 소리와 저가 저작운동을 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침묵뿐인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마지막 한 점까지 먹고 나서야 달그락거리던 소리는 멈추었다. 쿠로오는 제 쪽으로 내밀어지는 컵에 물을 몇 모금 삼키고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남자는 저가 도망친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돌아와서 얘기하자며. 입 안에 텁텁한 음식의 느낌에 쿠로오는 물을 몇 모금 더 삼키고 제 쪽으로 내밀어지는 손에 컵을 들려주었다.






 “누워보실래요? 배 좀 봐요.”






 저가 기절해 있는 동안 씻기고, 옷도 갈아입히고, 의사에게까지 보였으면서도 태연스레 저런 말을 한다. 불퉁한 마음이 들었지만 쿠로오는 순순히 침대 위에 누웠다. 단정한 손끝이 제일 아래쪽부터 톡, 톡, 단추를 풀어나갔다. 슥,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이 올라왔다. 미묘해지는 기류에 쿠로오는 시선을 천장에 두었다. 지겨운 패턴. 명치 즈음에서 얼쩡대던 손이 멈추고, 옷깃이 옆으로 벌어졌다.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 제 배를 보았다. 몇 달간 제대로 햇빛을 보지 못해 희게 질린 살결에 물감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얼룩덜룩하게 멍이 들어있었다. 단정한 손이 멍 위를 가볍게 쓸어냈다. 옅은 통증이 느껴졌다.






 “멍이 좀 심하게 들었네요.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제 쪽을 보는 파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쿠로오는 들었던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배를 쓰다듬는 손이 조금 더 넓은 부위를 쓸어냈다. 손의 온도는 조금 차가운 것도 같았다. 배를 쓰다듬던 손이 위로 올라와 뺨을 살짝 쓸었다. 열이 조금 있네요. 뺨을 더듬어 내린 손이 목줄기를 쥐었다. 다른 손이 머리 옆에 짚어지고, 그대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쪽, 쪽, 느릿하게 입술을 몇 번 빨았다 떨어진 입술이 완벽히 겹쳐지고, 그대로 혀가 파고들었다. 슥, 바닥을 짚고 있던 무릎마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집요한 키스였다. 혀 놀림 하나, 호흡 하나까지 전부 통제하겠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비틀려 하자 덥썩, 머리칼이 잡혔다. 쿠로오는 눈썹을 찡그렸다. 숨을 쉬기 위해 조금 더 벌어진 입술마저 전부 삼켜졌다. 으응, 흐, 응.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몸을 들썩거려도 제 위에 올라탄 몸 탓에 반항이 쉽지가 않았다.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흐윽, 읏, 으, 응, 푸하, 하, 아카아, 읏!”






 짧게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바짝 붙어왔다. 침대 시트만 움켜쥐었던 손은 제 목을 잡은 팔을 쥐고 손톱을 세웠다. 혀가 온통 입 안을 전부 채우고 입술을 물어 뜯어낼 것처럼 굴었다. 검붉게 멍이 든 배 위로 문질러지는 것에 쿠로오는 있는 힘껏 제 위에 올라탄 몸을 밀어냈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쿠로오는 헉, 헉,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헉, 흐으, 하, 미친, 하아, 이 미친 새끼야.”

 “……보고 싶었어요.”






 뻗어온 양 손이 벌겋게 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쓸어냈다. 쿠로오는 금세 무표정한 가면을 덧쓴 얼굴을 노려보았다. 숨이 쉽게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이 그대로 위로 올라와 뒤통수를 감쌌다. 이마가 맞닿아 호흡이 닿았다.






 “돌아가 버린 줄 알았어요.”






 갈 곳도 없는데. 쪽, 느릿하게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쿠로오는 잘근, 제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다 당신이 찾을 수 없을 만큼 부숴 놨는데.”






 이마에서 떨어진 입술이 눈꺼풀 위에 닿았다.






 “내가 그렇게 해놨는데. 웃기죠.”






 눈꺼풀에서 떨어진 입술이 쪽, 가볍게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웃기죠,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정작 본인도 웃지를 않았다. 쿠로오는 제 바로 앞에서 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를 밀어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뒤통수를 감싸 쥐고 있던 손 하나가 제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 위로 겹쳐졌다.






 “당신은 그 어디도 갈 수 없는데, 금방이라도 어디로 또 도망가 버릴 것 같아.”






 손을 움켜쥔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쿠로오는 고통에 눈을 찌푸리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퍽, 제 앞에 놓인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다행스럽게도 제 위에 올라타 있던 몸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로오는 본인이 쳐 놓고도 얼얼한 주먹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호흡이 불규칙하게 드나들었다. 쿠로오는 비틀대며 침대에서 일어나 벽으로 몸을 붙였다.






 “내가, 씨발, 왜 어디도 갈 수 없어.”

 “……제가 그렇게 할 거니까요.”






 퉤. 조금 어긋난 것 같은 턱을 맞추던 남자가 뱉어낸 것 시뻘건 색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멀쩡한 얼굴로 일어난 남자는 맞은 뺨을 한 번 손등으로 문지르곤 쿠로오의 앞에 섰다. 분명 저보다도 큰 키 일 것이 분명한데도 눈을 맞추자 잔뜩 움츠린 탓인지 고개를 조금 숙여야 했다. 남자는 웃었다.






 “네코마도 부쉈고, 당신의 가족들은 죽였고, 친구들도 모조리 당신이 갈 수 없는 바닥까지 전부 밀어 넣었어요. 원한다면 하나하나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알려드릴 수도 있어요.”

 “아카아시…….”

 “굳이 알려드리지 않아도 다 보셨겠지만.”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있던 웃음이 짙어졌다. 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눈동자가 완벽하게 깨어진 것을 보는 쾌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선에 아카아시는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가 품 안 가득 그를 끌어안았다. 처음 안았을 때보다도 마른 몸은 이제 이렇게 얌전히 품에 안기기도 했다. 아까 맞은 뺨을 그 머리에 기대며 아카아시는 물기가 말라 부슬거리는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먹었으니까 좀 잘까요?”






 제 물음에 대답은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아카아시는 더 움츠러드는 몸을 안은 채 침대로 향했다. 스릉, 발목에 연결된 사슬이 바닥에 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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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오고 있었다.



 쿠로오는 축축이 젖은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으아, 소리를 한 번 내질렀다. 소리를 지른다고 더위가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치고 오르는 짜증을 표출이라도 해야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평소엔 전혀 아무 생각이 없던 앞머리가 유난스레 짜증이 났다. 완전히 젖은 것이 아닌 앞머리는 귀찮을 정도로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 땀방울이 떨어지는 앞머리를 몇 번 쓸어 올리던 쿠로오는 결국 포기를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바람이 불면 퍽 시원했기 때문에 에어컨은 켜주지 않아 뛰는 운동을 하는 저는 마냥 더울 따름이었다. 쿠로오는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유난히 덥고 지치는 날이었다.






 “쿠로오 상!”

 “으응-, 먼저 시작해.”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손을 대충 내저은 쿠로오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도저히 훈련을 이어갈만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결국 쿠로오는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물통을 입에 물었다. 3학년 주장의 특권으로 하루쯤은 노닥거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물통을 몇 번 빨던 쿠로오는 그 물조차 미적지근해 몇 모금 넘기지 않고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진정된 호흡에 쿠로오는 그나마 냉기가 도는 벽에 등을 기대며 이리저리 뛰는 부원들을 보았다. 입학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상태라 처음 그 오합지졸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 1학년들은 더 훈련의 성과도가 좋았다. 물론 리에프는 예외였지만. 제 쪽으로 던져진 공을 결국 안면으로 받아내는 리에프를 보며 쿠로오는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사자 군 여전하네. 아니, 호랑이였던가?”

 “악! 뭐야!”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옆을 보았다. 시원하게 위로 싹 올려버린 회색 머리가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제 쪽을 보며 씩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하, 웃으며 이마를 덮은 제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보쿠토?”

 “보고 싶어서 왔어, 쿠로오.”






 제 쪽으로 쓱 뻗어지는 손에 쿠로오는 킥킥 웃으며 그 손을 잡고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켰다. 훅,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받아.”

 “땡큐.”






 휙 던지는 것을 공중에서 낚아챈 쿠로오는 바로 느껴지는 시원함에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뺨에 댔다. 서늘한 알루미늄 캔의 감촉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뺨에 닿아 열기를 조금 식혀주었다. 쿠로오는 캔을 뺨에 굴리며 먼저 벤치에 앉아 캔을 따는 보쿠토의 옆에 앉았다. 오는 길이 제법 더웠는지 벌컥벌컥 음료를 들이키는 시간이 퍽 길었다. 쿠로오는 그것을 보다 저도 캔을 따 한 모금 머금었다. 탄산 특유의 톡 쏘는 시원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연이어 몇 모금 꿀꺽꿀꺽 삼켜낸 쿠로오는 흘깃, 제 옆에 앉은 보쿠토를 보았다. 보쿠토는 탄산 탓에 목이 따가운 지 크으, 고개를 흔들어댔다.






 “근데 진짜 왜 왔어?”

 “너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징그럽게.”






 장난스럽게 고개를 쓱 들이밀며 하는 말에 쿠로오는 똑같이 키득대며 몸을 뒤로 뺐다. 가까이 앉은 탓에 팔의 맨살이 맞닿았다. 어느 새 땀이 식었는지 맞닿는 팔이 부드러웠다.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여름처럼 후덥지근했던 체육관 내부와는 달리 바깥은 연신 바람이 불어 벤치에 앉아있으니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남은 음료를 전부 마셔 빈 캔을 휴지통으로 던져 넣은 보쿠토는 캔이 골인하자 예에-, 하며 쿠로오에게 몸을 기댔다. 쿠로오는 익숙하게 몸을 뒤척여 보쿠토가 기대기 편하도록 했다. 3년째 알고 지내다보니 이런 것들도 아무렇지도 않아진 지 오래였다. 쿠로오도 캔을 비워내 휴지통에 던져 넣고 몸을 조금 뒤로 젖혔다. 하늘이 조금 파래졌고, 괜히 가슴을 간질이던 분홍빛의 나무들도 어느 새 초록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확실히 여름이 오고 있구나. 쿠로오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근데, 진짜야.”

 “응?”

 “진짜 너 보고 싶어서 왔다고.”

 “뭐야, 쿠로오 씨는 비싸답니다?”






 키득키득 장난으로 대꾸를 했지만 그에 대답은 없었다. 쿠로오는 고개를 숙여 제 몸에 기댄 보쿠토를 내려다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낯짝을 기대했건만, 사뭇 진지한 눈빛이 저를 향했다. 쿠로오는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마주치고, 멀리서 신발과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와 공이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짱을 낀 채였던 팔이 풀리고, 조금은 뜨겁게 열기를 품은 손바닥에 허벅지를 짚었다. 쓱 다가온 얼굴이 가까웠고, 툭, 이마가 닿았다. 몸이 꼭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깜빡, 간신히 움직인 눈꺼풀이 잠시 시야를 가렸다. 다시 활짝 밝아진 시야엔 씩 웃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눈은 왜 감냐?”

 “……야이씨! 뭐 이딴 장난을 하냐!”

 “뭐야, 속았어?”






 아하하하, 시끄럽게도 웃는 소리에 쿠로오는 홧홧한 뺨을 손등으로 한 번 문질렀다. 코타로 군한테 속다니, 분하다. 장난스레 이를 갈며 하는 말에 보쿠토는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닿아있던 살갗들이 전부 떨어졌다. 오늘 훈련 없어? 멍하니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운동장을 보며 하는 말에 어엉-, 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려 다리를 떨던 쿠로오는 흘깃, 제 옆을 보았다. 보쿠토의 회색 머리칼이 바람에 조금 흩날렸다. 마치, 수면에 반사되는 빛과 같은 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그 머리칼을 헝클인 쿠로오는 그대로 팔을 내려 보쿠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 머리 망가져!”

 “아이고, 우리 보쿠토 군, 형아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나요?”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키득키득 웃자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는 손이 뜨끈했다. 원래 이렇게 열이 많았었나,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곧 쿠로오는 고개를 까닥였다. 늘 열이 많다 못해 넘쳐 여기저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것이 보쿠토였다. 내내 힘든 훈련을 했던 탓인지 잠깐 쉬었다고 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어깨를 감쌌던 팔을 풀고 몸을 바로 세웠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도 스륵, 떨어져나갔다.






 “나 이제 들어 가봐야 해. 잠 온다.”

 “벌써?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니까 다음엔 말 좀 하고 오세요, 보쿠토 군?”






 에이. 찌푸려지는 얼굴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미묘한 이질감이 피어올랐다. 원래 이랬던가. 쿠로오는 가슴께를 문질렀다. 몸을 일으키자, 저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 시야의 끝에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벚꽃을 지금 다시 본 것 같은 기분. 체육관의 앞에서야 쿠로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저를 따라오던 보쿠토가 살짝 부딪쳤다.






 “어디까지 오게? 연습 못 한 게 아쉬워서 여기까지 오는 거야?”






 앗차, 하면서 뒷걸음질 치던 보쿠토는 마주 킥킥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며 쿠로오는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가슴이 답답한 것도 같고.






 “이만 들어갈게.”

 “저기, 쿠로오.”






 응? 제 손목을 잡는 손이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체육관 문 옆으로 몸이 당겨져 비틀, 걸음이 꼬였다.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끝이 보였다. 소리도 없이 뺨에 꾹,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꼬였던 걸음이 제대로 다시 서게 되고, 잡혔던 손목은 놓였다.






 “다음에 또 보자!”






 성큼 뒤로 빠졌던 몸이 손을 흔들고 그대로 도망치듯 저만치 뒤통수가 멀어졌다.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눈만 깜빡거렸다.






 “뭐야, 이게…….”






 미쳤나봐……, 보쿠토 미친 놈……. 보쿠토가 사라진 교문 쪽을 보며 쿠로오는 미쳤다는 말만 중얼댔다. 후끈거리는 목덜미를 스쳐지나간 바람이 퍽 시원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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