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고 있었다.



 쿠로오는 축축이 젖은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으아, 소리를 한 번 내질렀다. 소리를 지른다고 더위가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치고 오르는 짜증을 표출이라도 해야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평소엔 전혀 아무 생각이 없던 앞머리가 유난스레 짜증이 났다. 완전히 젖은 것이 아닌 앞머리는 귀찮을 정도로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 땀방울이 떨어지는 앞머리를 몇 번 쓸어 올리던 쿠로오는 결국 포기를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바람이 불면 퍽 시원했기 때문에 에어컨은 켜주지 않아 뛰는 운동을 하는 저는 마냥 더울 따름이었다. 쿠로오는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유난히 덥고 지치는 날이었다.






 “쿠로오 상!”

 “으응-, 먼저 시작해.”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손을 대충 내저은 쿠로오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도저히 훈련을 이어갈만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결국 쿠로오는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물통을 입에 물었다. 3학년 주장의 특권으로 하루쯤은 노닥거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물통을 몇 번 빨던 쿠로오는 그 물조차 미적지근해 몇 모금 넘기지 않고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진정된 호흡에 쿠로오는 그나마 냉기가 도는 벽에 등을 기대며 이리저리 뛰는 부원들을 보았다. 입학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상태라 처음 그 오합지졸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 1학년들은 더 훈련의 성과도가 좋았다. 물론 리에프는 예외였지만. 제 쪽으로 던져진 공을 결국 안면으로 받아내는 리에프를 보며 쿠로오는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사자 군 여전하네. 아니, 호랑이였던가?”

 “악! 뭐야!”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옆을 보았다. 시원하게 위로 싹 올려버린 회색 머리가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제 쪽을 보며 씩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하, 웃으며 이마를 덮은 제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보쿠토?”

 “보고 싶어서 왔어, 쿠로오.”






 제 쪽으로 쓱 뻗어지는 손에 쿠로오는 킥킥 웃으며 그 손을 잡고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켰다. 훅,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받아.”

 “땡큐.”






 휙 던지는 것을 공중에서 낚아챈 쿠로오는 바로 느껴지는 시원함에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뺨에 댔다. 서늘한 알루미늄 캔의 감촉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뺨에 닿아 열기를 조금 식혀주었다. 쿠로오는 캔을 뺨에 굴리며 먼저 벤치에 앉아 캔을 따는 보쿠토의 옆에 앉았다. 오는 길이 제법 더웠는지 벌컥벌컥 음료를 들이키는 시간이 퍽 길었다. 쿠로오는 그것을 보다 저도 캔을 따 한 모금 머금었다. 탄산 특유의 톡 쏘는 시원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연이어 몇 모금 꿀꺽꿀꺽 삼켜낸 쿠로오는 흘깃, 제 옆에 앉은 보쿠토를 보았다. 보쿠토는 탄산 탓에 목이 따가운 지 크으, 고개를 흔들어댔다.






 “근데 진짜 왜 왔어?”

 “너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징그럽게.”






 장난스럽게 고개를 쓱 들이밀며 하는 말에 쿠로오는 똑같이 키득대며 몸을 뒤로 뺐다. 가까이 앉은 탓에 팔의 맨살이 맞닿았다. 어느 새 땀이 식었는지 맞닿는 팔이 부드러웠다.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여름처럼 후덥지근했던 체육관 내부와는 달리 바깥은 연신 바람이 불어 벤치에 앉아있으니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남은 음료를 전부 마셔 빈 캔을 휴지통으로 던져 넣은 보쿠토는 캔이 골인하자 예에-, 하며 쿠로오에게 몸을 기댔다. 쿠로오는 익숙하게 몸을 뒤척여 보쿠토가 기대기 편하도록 했다. 3년째 알고 지내다보니 이런 것들도 아무렇지도 않아진 지 오래였다. 쿠로오도 캔을 비워내 휴지통에 던져 넣고 몸을 조금 뒤로 젖혔다. 하늘이 조금 파래졌고, 괜히 가슴을 간질이던 분홍빛의 나무들도 어느 새 초록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확실히 여름이 오고 있구나. 쿠로오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근데, 진짜야.”

 “응?”

 “진짜 너 보고 싶어서 왔다고.”

 “뭐야, 쿠로오 씨는 비싸답니다?”






 키득키득 장난으로 대꾸를 했지만 그에 대답은 없었다. 쿠로오는 고개를 숙여 제 몸에 기댄 보쿠토를 내려다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낯짝을 기대했건만, 사뭇 진지한 눈빛이 저를 향했다. 쿠로오는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마주치고, 멀리서 신발과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와 공이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짱을 낀 채였던 팔이 풀리고, 조금은 뜨겁게 열기를 품은 손바닥에 허벅지를 짚었다. 쓱 다가온 얼굴이 가까웠고, 툭, 이마가 닿았다. 몸이 꼭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깜빡, 간신히 움직인 눈꺼풀이 잠시 시야를 가렸다. 다시 활짝 밝아진 시야엔 씩 웃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눈은 왜 감냐?”

 “……야이씨! 뭐 이딴 장난을 하냐!”

 “뭐야, 속았어?”






 아하하하, 시끄럽게도 웃는 소리에 쿠로오는 홧홧한 뺨을 손등으로 한 번 문질렀다. 코타로 군한테 속다니, 분하다. 장난스레 이를 갈며 하는 말에 보쿠토는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닿아있던 살갗들이 전부 떨어졌다. 오늘 훈련 없어? 멍하니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운동장을 보며 하는 말에 어엉-, 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려 다리를 떨던 쿠로오는 흘깃, 제 옆을 보았다. 보쿠토의 회색 머리칼이 바람에 조금 흩날렸다. 마치, 수면에 반사되는 빛과 같은 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그 머리칼을 헝클인 쿠로오는 그대로 팔을 내려 보쿠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 머리 망가져!”

 “아이고, 우리 보쿠토 군, 형아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나요?”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키득키득 웃자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는 손이 뜨끈했다. 원래 이렇게 열이 많았었나,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곧 쿠로오는 고개를 까닥였다. 늘 열이 많다 못해 넘쳐 여기저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것이 보쿠토였다. 내내 힘든 훈련을 했던 탓인지 잠깐 쉬었다고 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어깨를 감쌌던 팔을 풀고 몸을 바로 세웠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도 스륵, 떨어져나갔다.






 “나 이제 들어 가봐야 해. 잠 온다.”

 “벌써?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니까 다음엔 말 좀 하고 오세요, 보쿠토 군?”






 에이. 찌푸려지는 얼굴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미묘한 이질감이 피어올랐다. 원래 이랬던가. 쿠로오는 가슴께를 문질렀다. 몸을 일으키자, 저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 시야의 끝에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벚꽃을 지금 다시 본 것 같은 기분. 체육관의 앞에서야 쿠로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저를 따라오던 보쿠토가 살짝 부딪쳤다.






 “어디까지 오게? 연습 못 한 게 아쉬워서 여기까지 오는 거야?”






 앗차, 하면서 뒷걸음질 치던 보쿠토는 마주 킥킥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며 쿠로오는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가슴이 답답한 것도 같고.






 “이만 들어갈게.”

 “저기, 쿠로오.”






 응? 제 손목을 잡는 손이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체육관 문 옆으로 몸이 당겨져 비틀, 걸음이 꼬였다.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끝이 보였다. 소리도 없이 뺨에 꾹,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꼬였던 걸음이 제대로 다시 서게 되고, 잡혔던 손목은 놓였다.






 “다음에 또 보자!”






 성큼 뒤로 빠졌던 몸이 손을 흔들고 그대로 도망치듯 저만치 뒤통수가 멀어졌다.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눈만 깜빡거렸다.






 “뭐야, 이게…….”






 미쳤나봐……, 보쿠토 미친 놈……. 보쿠토가 사라진 교문 쪽을 보며 쿠로오는 미쳤다는 말만 중얼댔다. 후끈거리는 목덜미를 스쳐지나간 바람이 퍽 시원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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