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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회색 하늘 아래 도시 전체가 회색으로 젖어 내렸다. 창가에 이마를 기대어 밖을 내다보다, 내뱉은 숨결에 뿌옇게 서리는 입김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입김 탓에 잠시 보이지 않았던 바깥은 다시 보여도 여전히 우중충한 빛깔이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려 저만치 소파에 앉아있는 무뚝뚝한 뒤통수를 보았다. 완벽한 배구 실력처럼 깔끔을 떨 것 같았건만 머리칼은 어제 저가 흐트러뜨려 놓은 것 그대로 엉망이었다. 오이카와는 완전히 몸을 돌려 창문에 몸을 기대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굳센 목엔 뒷덜미에도 잇자국이 벌겋게 나 있었고 딱 벌어진 어깨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좀 덜 깨물 걸. 문득 든 생각에 오이카와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내가 우시와카 쨩을 왜 생각해 줘야 해? 늘 하는 치기어린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눈을 반쯤 감았다. 차가운 냉기가 창문의 유리를 타고 오이카와의 살갗을 차갑게 식혀냈다. 춥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쯤 오이카와의 시선이 머물러있던 뒤통수가 스륵,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오이카와.”

 

 

 

 

 

 고개는 반쯤 돌린 채 눈동자를 굴려 저를 보는 시선은 마치 매와 같았다. 이 쪽으로 오라는 말을 빙 돌려 말하는 것은 오이키와의 성이 차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저를 보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을 먼저 거둔 것은 우시지마였다. 다시 앞을 보는 뒤통수에 오이카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우시와카 쨩이 뭔데 내 눈을 먼저 피해. 울컥 올라오는 분노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곧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에 오이카와는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제 발치 앞에 선 걸음과 제 입술께를 쓰다듬는 엄지는 다정함이 뚝뚝 묻어났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눈매를 일그러뜨린 채 시선을 들지 않았다.

 

 

 

 

 

 “씹으면 아프지 않은가.”

 “……아파.”

 “이를 세우지 마라.”

 

 

 

 

 

 엄지로 눌러 오이카와의 이에서 입술을 해방시킨 우시지마는 그대로 손을 뗐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무는 대신 이를 악 물었다. 멍청한 우시와카 쨩. 바보. 속으로 욕하면서도 오이카와는 제 어깨를 잡고 창문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그 손에 제 몸을 맡겼다. 등을 쓸어내려 그 냉기를 떨쳐낸 우시지마는 다시 손을 뗐다. 오이카와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게 손을 대지 않으면서 제게서 멀어지지도 않는 우시지마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았다. 여전히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건드리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그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추워. 내뱉듯 읊조리는 소리에 우시지마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는 팔.

 

 

 

 

 

 “안아줘, 바보 우시와카.”

 

 

 

 

 

 그제야 저를 품에 안는 팔에 오이카와는 그 품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저가 그렇게 만들었으면서,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가슴께를 퍽, 쳤다. 우시지마의 턱이 오이카와의 정수리를 꾹 눌렀다.

 

 

 

 

 

 “몸이 차다, 오이카와.”

 “추워.”

 “침대로 갈까.”

 “변태야, 우시와카 쨩?”

 

 

 

 

 

 툴툴거리는 소리에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를 침대 근처로 옮겼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오이카와는 침대 맡에 앉은 우시지마의 팔을 움켜쥐었다. 아무데도 가지 마. 이불 속에서 웅얼대는 소리에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마주 잡아지지 않는 손을 보던 오이카와는 잡았던 손을 놓고 그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그랬다. 경기를 뛰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스쳐 지나가지 않고 꼭 몇 초라도 머물다가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위화감, 그 다음에는 의혹, 의혹은 곧 짜증으로 변모했지만 종내에는 깨달음이었다.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저를 따라다니는 여자아이들의 눈빛에서 보이는 그 따뜻한 감정들이 무뚝뚝한 무표정에서 흘러 넘쳤다. 마치 경기에서 이긴 듯 한 쾌감이 일었다. 그 우시지마가 나를 좋아한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했다.

 

 

 

 

 

 

 

 

 

 

 -우시와카 쨩. 혹시 나 좋아해?

 

 

 

 

 

 평소와 같이 그렇게 부르지 말라 하려 벌어졌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먼저 피한 적 없던 시선이 도르륵, 옆을 향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고 그 목덜미 뒤로 팔을 뻗어 깍지를 낀 채 그 얼굴을 마주했다. 나 봐, 우시와카 쨩. 그제야 다시 마주치는 시선은 따뜻함을 넘어서 뜨거운 감정이 눈동자 안에 엉켜있다. ? 말해봐 우시와카 쨩. 나 좋아해? 한 걸음 다가가 가까워진 얼굴은 조금쯤 일그러진 듯 했다. 좀처럼 나오지 않는 대답에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미 들킨 주제에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깍지를 꼈던 손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저를 보는 시선은 뜨거웠다. 재미없어. 몸을 돌려 한 걸음 걷는 순간, 덥썩 손목을 잡아당기는 힘에 벽에 등을 부딪쳤다.

 

 

 

 

 

 -오이카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팔 사이에 가두어져 올려다보는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귓가에 입김이 닿았다. 좋아한다, 오이카와. 뜨거운 입김이 귀를 간질이고, 가까웠던 몸은 다가왔던 것처럼 천천히 멀어졌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감기지가 않았다. 뺨을 감싸는 손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슬몃 닿아오는 입술의 감촉에 고개를 틀어 피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하지 마, 키스.

 

 

 

 

 

 뺨을 쥐었던 손은 뒤통수로 넘어가 부드럽게 감쌌다. 허리를 안아오는 팔이 굳셌다. 다시 닿는 입술에 그 옷깃을 움켜쥐었다. 뜨거워. 밀려드는 혀에 눈을 감았다. 온통 뜨거웠다.

 

 

 

 

 

 

 

 

 

 

 오이카와는 눈을 떴다. 창문을 두드리던 빗방울은 여전했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몸을 일으켰다. 뒤통수를 느리게 잡아당기는 꿈의 여운에 오이카와는 마른세수를 하도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제 주위를 둘러본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익숙한 뒤통수가 없었다.

 

 

 

 

 

 “우시지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벗은 상체의 체온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우시지마. 다시 한 번 부른 이름에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본 곳엔 고개를 내민 우시지마가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을 감출 수가 없어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였다. 곧 다가온 몸이 앞에 섰다. 어디 안 간다고 했잖아. 칭얼거리는 것처럼 나온 소리에 오이카와는 주먹을 꾹 쥐었다.

 

 

 

 

 

 “우시와카 쨩은 왜 말을…….”

 

 

 

 

 

 오이카와는 이마를 박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를 꾹 껴안는 품이 뜨거웠다. 식었던 살갗에 뜨거운 체온이 따뜻했다.

 

 

 

 

 

 “미안하다.”

 “……바보 우시와카 쨩.”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오이카와는 팔을 들어 그 허리를 안았다. 누가 안아 달래. 자그마하게 툴툴거리는 소리에도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식은 몸이 점차 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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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른 전력 60분 참여

 

 

 

 

 

 

 

 

 

 

 네코마는 봄고 예선에서 탈락했다.

 

 

 모두 한 걸음 더 내딛었고, 하나 더 리시브 했고, 하나 더 스파이크를 날렸지만 결국 경기는 네코마의 패배로 끝이 났다. 속상해 하는 모두를 달랜 것은 그였다. 괜찮아, 너희는 다음이 있잖아. 평소와 똑같이 짓궂게 웃는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평소처럼 그에게 웃어 보일 수 없었다. 우리는 다음이 있지만, 당신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내며 먼저 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을 보았다. 멋있는 척 하기는. 야쿠 상은 그렇게 툭하니 던지며 그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먼저 경기장을 나서는 그의 등을 따라 나섰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떼어 나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의 봄고는 그렇게 끝이 났다.

 

 

 

 

 

 

 

 

 

 

 리에프는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평상 시 같았으면 금방 도달했을 거리를 리에프는 미적거리고 있었다. 붉은 노을에 물든 체육관 벽은 평소와 달리 멀게만 느껴졌다. 리에프는 문 앞에 도착해 그 문을 슬쩍 밀었다. 굳게 잠겨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쉽게 밀려 열리는 문에 리에프는 가만히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캄캄한 체육관 안에 노을빛이 길을 만들어냈다. 리에프는 발을 떼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공이 튀는 소리와 신발이 마찰하는 소리, 급한 숨소리와 서로 주고받는 목소리로 시끄럽던 체육관 안은 고요했다. 리에프는 가방을 내려놓고 공을 하나 집어 들어 바닥에 튕겼다. , 하며 울리는 소리가 체육관 안에 울렸다. 리에프는 다시 걸음을 옮겨 한쪽 벽에 기대앉았다. 둥그런 공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던 리에프는 문득 노을빛을 가리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 뭐야. 하이바 군?”

 “……쿠로오 상.”

 “이야, 하이바 군이랑 같은 생각을 했다니. 자존심 상해.”

 

 

 

 

 

 키득키득 웃으며 체육관 안으로 들어온 쿠로오는 리에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쿠로오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그를 빤히 쳐다보던 리에프는 제 앞에 쿠로오가 앉아 턱을 괼 때 까지고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리에프의 손에 들린 공을 슥 빼낸 쿠로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려 공을 몇 번 튕기는 뒷모습은 여전히 커다랗고, 여전히 굳건했다. 쿠로오는 고개를 돌려 리에프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평소와 같이 짓궂게 웃었다.

 

 

 

 

 

 “리시브 연습하자, 하이바 군.”

 

 

 

 

 

 평소 같았으면 으엑, 하고 질색하는 소리가 나왔을 텐데, 리에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리에프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본 쿠로오는 손가락으로 공을 돌리며 평소에 늘 연습하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기 선 안이 아닌 체육관 한 쪽 구석. 쿠로오는 늘 자신이 서 있던 곳에 서서 천천히 공을 바닥에 튕겼다. 시작한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에 리에프는 리시브 자세를 잡았다.

 

 

 

 

 

 

 

 

 

 

 “후우, 하이바 군 언제 이렇게 리시브 실력이 늘었어?”

 

 

 

 

 

 주르르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낸 쿠로오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리에프는 리시브 자세를 풀고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리시브에 관해서는 거의 처음으로 쿠로오에게 받는 칭찬이었다. 그러나 제 가슴 안에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쿠로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고개만 숙인 채 서 있는 리에프를 빤히 보다 몸을 돌렸다. 벽 한 쪽에 던져 둔 가방 안에서 물병과 수건을 꺼낸 쿠로오는 다시 리에프에게 다가갔다. 저가 먼저 물을 쭉 삼키며 쿠로오는 리에프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덮었다. 바닥으로 뚝뚝,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쿠로오는 입에서 물병을 떼며 씩 웃었다.

 

 

 

 

 

 “지금 우는 거야, 하이바 군?”

 

 

 

 

 

 채 가려지지 않았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쿠로오는 처음 입학했을 때 보다 훨씬 커진 리에프를 아래서 올려다보았다.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며 눈을 질끈 감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에 쿠로오는 물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만히 그 목을 끌어안았다. 늘 이 체육관에서 보았던 빨간 저지가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던 리에프는 제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는 손에 결국 저를 안은 몸을 마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리에프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끄윽, …… 쿠로오 상이랑, 계속 경기하고 싶어요……. 흐윽…….”

 “하이바 군은 금방 나보다 잘하게 될 거야. 지금도 리시브를 이만큼 잘하게 됐잖아.”

 “선배들 없이, , 어떻게 해요…….”

 “1학년들도 새로 들어 올 거고, 우리의 뇌인 켄마도 남아 있잖아. 걱정하지 마.”

 “쿠로오 상…….”

 

 

 

 

 

 제 우상은 쿠로오 상 뿐이에요. 엉엉 우는 소리 사이로 뱉어지는 말에 쿠로오는 그 커다란 등을 쓸어내렸다. 그거 고맙네. 웃음 섞인 낮은 목소리에 리에프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깨가 축축이 젖어들었지만 쿠로오는 제 어깨에 묻은 얼굴을 떼어내지 않았다. 점차 어두워지는 체육관 안은 리에프의 울음소리만 메아리쳤다.

 

 

 네코마의 봄고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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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이 더럽게 나쁜 날이었다. 불길한 기분에 눈을 떠보니 원래 일어날 시간보다 훨씬 지나있었고, 타야 할 버스가 오지 않아 급히 택시를 잡아타자마자 택시 뒤로 버스가 왔고, 지각한 강의에 들어오자마자 강의 자료를 놓고 온 것이 생각이 났다. 이렇게도 운 나쁜 날이 있을까. 오늘 같은 날은 집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 누가 술 쏜대! 올 거지? 집에 처박혀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단박에 사라지고 오늘 같은 날은 술 마시고 풀어야지, 하는 맘이 들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술집으로 가서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했던 것이 기억났다. 얼굴이 뜨거운 채로 술을 들이키다 그 자리에 익숙한 얼굴이 끼어 있어 그 옆에 앉아 아는 척을 했던 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일단은.

 

 

 쿠로오는 제 몸을 더 단단히 끌어안는 팔에 끄응 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숙취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속이 뒤집혀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쓰렸다. 마치 무언가가 억지로 집어넣어졌던 것처럼.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제 몸뚱이를 끌어안는 팔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여자는 아니었다. 저가 이마를 기댄 가슴팍은 절벽에 가까운 여자도 아닌 단단한 남자의 가슴팍이었다. 나 어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기억을 더듬던 쿠로오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은 벗은 남자의 가슴팍이었다. 그것도 몸이 엄청 좋은. 쿠로오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어제 제 기억이 맞다면, 이 가슴팍은. 쿠로오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 진짜 미쳤다.”

 

 

 

 

 

 어제 술자리에서 보았던 익숙한 얼굴의 주인이 여기 있었다. 이마를 반쯤 덮은 짧은 머리칼과 남자다운 눈썹, 굳센 턱까지. 저를 끌어안은 이 남자는 그러니까, 대학 동기인 우시지마였다. 쿠로오는 그 품에서 벗어나려 살짝 다리를 움직였다가 퍼뜩 몸을 굳혔다. 허리가 커다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적나라한 그 아픔에 쿠로오는 울고 싶어졌다. 이 상황을 빨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떠올랐다. 남자랑 잔 것도 충격인데, 그것도 모자라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기였다. 쿠로오는 허리의 고통을 꾹 참고 잠에 빠진 얼굴을 감시하듯 보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싶은 그 때 감겨있던 눈이 방금 전 까지 잤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스르륵, 뜨였다.

 

 

 

 

 

 “…….”

 “…….”

 

 

 

 

 

 쿠로오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 얼굴을 본 채 굳었다. 말짱히 뜨인 눈은 몇 번 깜빡이더니 곧 시선을 조금 내렸다. 쿠로오는 그제야 제 벗은 몸이 이불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슬쩍 이불을 당겨 몸을 가렸다. 이게 꼭 부끄럼을 타는 여자 같아 기분이 상하는데, 무표정한 얼굴은 쿠로오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말짱한 얼굴과는 달리 눌린 머리가 우스웠지만 그 등에 한가득 난 손톱자국에 쿠로오는 시선을 돌렸다. 진짜 울고 싶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쓱쓱, 뻗친 뒷머리를 쓸어내린 우시지마는 쿠로오를 돌아보았다. 목과 이불 아래 드러난 어깨선엔 벌건 키스마크와 잇자국이 널려있었다. 우시지마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벗은 옷가지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침대 시트는 한껏 흐트러져 엉망이었다. 우시지마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어제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원치 않는 술자리에 앉아있었다. 자주 좀 보자며 누군가가 계속 술을 따라줬고, 술 경험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주량이 꽤 세다 생각했던 자신은 그 술을 계속 받아 마셨다. 뜨뜻하게 양 볼이 달아올랐을 때 즈음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아는 척을 했었다. 안녕, 우시와카 군. 발갛게 뺨이 달아올라 웃으며 저에게 하는 말에 저는 무어라 대답했었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며 이름을 가르쳐 줬던 것 같다. 그리고 서로에게 술을 따라주고, 술잔을 맞부딪힌 후부터 기억이 없었다. 아니, 사실 문득문득 기억이 났다. 우시지마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술이 센 타입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뒤늦게 훅 올라오는 타입이었나 보다.

 

 

 

 

 

 “저기, 우시와카 군?”

 “……?”

 “, 일단 옷 좀 입을까.”

 

 

 

 

 

 어색하게 뱉는 말에 우시지마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거였지만 속옷까지 전부 벗은 채였다. 우시지마는 몸을 일으켜 제 속옷을 주워들었다. 찝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우시지마를 보며 쿠로오는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았다. 옷을 입자고는 했지만 저릿저릿한 허리에 꼼짝도 할 수가 없어 쿠로오는 그저 우시지마가 옷을 입는 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바지까지 입은 우시지마는 다시 침대에 앉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쿠로오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우시와카 군, 아파, 물지 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아읏, 키스, 우시지마…….

 -내 이름이 뭐라고 했지, 테츠로?

 -후읏, 와카토시……, 거기…….

 -그렇게 불러라.

 

 

 

 

 

 쿠로오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얼른 이불에 파묻었다. 진짜 미쳤다. 쿠로오는 어제 제 위에서 달아오른 얼굴로, 반쯤 풀린 눈으로 저를 몰아붙이던 우시지마와 그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헐떡이던 자신의 기억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둘 다 술에 취해 미쳤었던 거다.

 

 

 

 

 

 “테츠로.”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줬음 하는데, 우시지마 군…….”

 “어제는 아무 말 하지 않지 않았나.”

 “, 어제는 취했었다고!”

 

 

 

 

 

 쿠로오는 당황해 얼떨결에 소리를 지르고 찌잉 울리는 허리에 끄응 앓으며 천장을 보았다. 이게 진짜 무슨 꼴이야. 제 반응에 침대에 출렁인다, 싶더니 팔뚝에 따끈한 열기를 담은 커다란 손이 닿아왔다. 쿠로오는 흠칫, 놀라며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입술이 부르터있었다. 쿠로오는 그 얼굴에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우시지마는 발갛게 부어오른 쿠로오의 눈가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댔다. 쓰라린 지 움찔, 눈을 감는 것에 우시지마는 쿠로오가 꽁꽁 덮은 이불을 재꼈다. 이불을 잡으려 허우적대는 반대쪽 팔 또한 잡은 우시지마는 울긋불긋한 상체를 내려다보았다. 지독히도 물어 놨다, 싶었다. 제 술버릇이 무는 건가 생각 될 정도로. 우시지마는 벌겋게 물든 쿠로오의 눈 위에 입술을 누르고 살짝 핥았다. , 하며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느껴졌다. 혀끝에 채 닦아내지 못한 소금기가 맴돌았다.

 

 

 

 

 

 “우시지마 군, 그만…….”

 “어제 이름을 가르쳐 줬을 텐데.”

 “우리 그 정도로 친하진 않…….”

 “섹스까지 했는데 어떻게 해야 더 친해지지?”

 

 

 

 

 

 적나라한 단에 쿠로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우시지마는 눈꺼풀에 누른 입술을 떼고 쿠로오를 내려다보았다. 성애의 흔적이 난잡한 몸은 색정적이었다. 우시지마는 어제의 자신이 어째서 이 남자와 잤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쿠로오는 잡힌 손목이 침대에 눌리는 것을 느끼며 우시지마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움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쿠로오는 다시 그 얼굴이 내려와 뭉근하게 입술에 문질러지는 감촉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 어제 잔뜩 눌린 탓에 손목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밀어내기도 마뜩찮았다. 입 안으로 들어오진 않고 몇 번이고 입술을 핥던 혀는 곧 떨어져 다시 멀어졌다.

 

 

 

 

 

 “책임지겠다.”

 “……? ?”

 “처음이지 않았나.”

 “, 그건……!”

 “내가 책임지겠다.”

 “하아, 우시지마 군…….”

 “이름을 부르라 했다, 테츠로.”

 

 

 

 

 

 쿠로오는 제 뺨에 쪽, 하고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에 으으, 하고 진저리를 쳤다. 곧 몸을 일으킨 우시지마는 바닥에 널브러진 쿠로오의 옷가지를 주워 와 쿠로오의 이불을 완전히 걷어냈다. ! 하고 소리를 지르는 쿠로오에게, 허리 아프지 않나 입혀주겠다. 하며 태연스레 쿠로오의 다리를 붙잡아 올리던 우시지마는 그대로 멈췄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멀건 액이 주륵, 흘렀다. 중요 부위는 잽싸게 가렸던 쿠로오는 더 이상 얼굴이 달아오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깜빡이던 우시지마는 몸을 일으켜 서랍을 뒤지더니 구비되어 있던 물티슈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다시 발목을 붙잡는 손에 쿠로오는 질색을 했다.

 

 

 

 

 

 “내가 할게, 내가!”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대충 닦기라도 할 거니까! 내가 할게!”

 “다음부턴 안에 하지 않겠다.”

 

 

 

 

 

 쿠로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우시지마는 쿠로오의 다리를 벌리며 물티슈로 흐른 것을 살살 닦기 시작했다. 진이 빠진 쿠로오는 그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 손길을 받았다. 꽤나 조심스런 손길에 한숨을 내쉬던 쿠로오는 우시지마의 말을 곱씹었다. 다음?

 

 

 

 

 

 “저기, 우시지마 군?”

 “…….”

 “저기?”

 “…….”

 “하아…… 와카토시?”

 “왜 그러지, 테츠로?”

 “저기, 다음엔 안에 안 한다고……?”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았나.”

 “우시…… 아니, 와카토시. 우선 나는 여자도 아니고, 어제 잔 건 그냥 하루 실수 한 거라고 생각…….”

 “너와 사귀고 싶다, 테츠로.”

 

 

 

 

 

 대뜸 던져진 돌직구에 쿠로오는 멍하니 우시지마의 얼굴을 보았다. 꽤나 정성들여 아래를 닦던 우시지마는 쿠로오의 얼굴을 보았다. 쿠로오는 눈을 깜빡이다 그대로 대자로 뻗었다. 자 고집을 꺾을 힘도, 자신도 없었다. 쿠로오는 제 발목을 잡아오는 손에 발목을 내밀어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맘대로 하십쇼…….”

 

 

 

 

 

 힘 빠진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쿠로오의 발목을 놓고 물티슈를 휴지통에 버린 뒤 쿠로오의 옆에 앉아 그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데려다 주겠다. 퍽 다정하게 이마를 쓸어주는 손에 쿠로오는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술이 떡이 되도록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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