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톡회에서 드렸던 앜쿨 뒷내용....










 와이셔츠가 젖어들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쿠로오는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숨통이 죄여드는 것 같았다. 완벽히 벗어났다 생각했었고, 며칠간은 확실히 그랬었다. 놈이 분명 저를 찾아낼 것이란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젖은 바지가 다리에 감겨들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빠르게 걷기가 힘이 들었다. 어느새 꽤나 길어진 머리칼이 젖은 탓에 축 늘어져 시야를 가렸다. 쿠로오는 씹어뱉듯 욕설을 토해내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잔뜩 물이 찬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 든 쿠로오는 홀더를 누르려다 그대로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퐁당, 경쾌하기도 한 소리를 내며 휴대전화는 그대로 고여 있던 물웅덩이에 빠져 버렸다.






 “아-, 씨-발.”






 어느새 입에 붙은 욕을 뱉어내며 휴대전화를 주우려 허리를 숙인 쿠로오는 제 앞에 턱, 서는 구두에 눈을 깜빡였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갈색의 구두는 흙과 빗물에 잔뜩 더럽혀져 있었다. 물웅덩이 속에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음에도, 쿠로오는 허리를 펴지 못했다. 온통 빗소리만 주변에 가득했다.






 “고개 언제 들 겁니까?”






 반듯하게 서 있던 구두가 삐딱하게 움직여 마치 짝 다리를 짚은 모양새를 했다. 쿠로오는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구두 끝부터 시선을 들어올렸다. 더러운 구두에 비해 입고 있는 정장 바지는 바짓단이 조금 젖은 것만 제외하면 퍽 깔끔했다. 그와 상반되게 빗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는 자신이 웃겼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손끝이 쥐고 있던 우산을 기울였다. 저가 봐도 하얗게 질린 손으로, 쿠로오는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이미 다 젖었어.”

 “알아요.”

 “너나 써.”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쿠로오는 다시 빗속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빗방울이 연신 몸 여기저기를 두드리며 체온을 빼앗아갔다. 쿠로오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 더 기울여지던 우산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이번엔 걸음이 움직였다. 성큼, 제 쪽으로 다가오는 걸음에 쿠로오는 똑같은 보폭으로 뒤로 물러섰다. 찰박, 찰박, 걸음이 움직일 때마다 좁은 골목에 발자국 소리만 메아리쳤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뒷걸음질을 치던 쿠로오는 등 뒤로 선뜻한 감촉에 닿아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등이 벽에 닿았다. 등 뒤의 벽을 흘깃, 한 번 본 쿠로오는 다시 시선을 제 앞에 두었다. 우산으로 얼굴이 반쯤 가려진 탓에 그 눈이 보이지 않았다. 자박자박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우산이 슥, 위로 들렸다. 푸른 눈이 마주했다. 빗방울이 더 이상 속눈썹을 두드리지 않았고, 우산 속엔 단 둘 뿐이었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하실 생각이세요?”

 “너 때려 칠 때까지.”

 “인내심 대결 같은 걸 하시자는 거면 저는 좋아요.”






 이런 거 자신 있거든요. 고개를 까닥, 옆으로 기울이는 것을 보며 쿠로오는 비를 맞아 다시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단 하나의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단박에 목덜미든 옆구리든 물어뜯길 것만 같았다. 쓱, 손이 제 앞으로 내밀어졌다. 빗물에 퉁퉁 불어 퍼렇게 보일 지경인 제 손과는 전혀 다르게 멀끔한 손을 보자니 여러 감정이 뇌리에 엉겨 붙었다. 입술만 꾹 깨물고 있자 내밀어진 손은 재촉이라도 하듯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쿠로오는 슬쩍 눈을 굴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안 가.”

 “왜요?”

 “너랑 안 가.”






 허공에서 흔들거리던 손이 내려갔다. 심장이 쿵쿵, 귀 옆에 뛰는 것만 같았다. 고작 그 말 몇 마디 했다고 불안함에 그 손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제가 싫었음에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 몇 달 새에 길들여진 몸이 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인가. 볼 안 쪽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손이 떨리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낸 쿠로오는 제 뺨에 닿아오는 것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뺨이 차요.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매끄럽게도 흘러나왔다. 전 같았으면 그저 그 손에 뺨을 기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쿠로오는 고개를 저어 그 손을 떼어냈다. 말끔했던 손이 제 뺨에 있던 물기에 젖어있었다. 손이 툭, 떨어지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곧 다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네코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한숨과 함께 툭 튀어나온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쿠로오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눈만 깜빡였다.






 “누구도 반기지 않을 거 아시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고집부리세요.”

 “……고집?”

 “현실을 보세요. 자꾸 헛짓 하지 마시고.”

 “그래서 너랑 안 가겠다는 거야.”






 현실을 보라며. 쿠로오는 입술을 꽉 깨물고 제 앞에 있는 이의 어깨를 확 밀쳤다. 그 말끔한 몸이 비틀거리는 사이 쿠로오는 그 옆을 지나쳤다. 성큼성큼, 자신이 뒷걸음질을 치며 걸어왔던 길을 단숨에 지나친 쿠로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머리로 열이 몰려 귀끝이 뜨거운 것도 같았다. 골목을 막 벗어나려는 찰나, 손목이 덥석 잡혀 몸이 뒤로 끌려갔다.






 “놔, 이 새끼야!”

 “일단 여기서는 할 말이 아니니까요, 돌아가서 얘기해요.”

 “내가 어디로 돌아ㄱ……!”






 어깨를 가볍게 쥔 손이 몸을 앞으로 당기며 무릎이 쿠로오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컥, 소리만 간신히 낸 쿠로오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고,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쓰러지는 몸을 가뿐하게 품에 안았다.






 “차.”

 “네.”






 골목 바깥쪽에 있던 남자가 차를 준비시킬 동안, 말끔한 손이 쿠로오의 젖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차가워. 하얗게 질린 살갗을 훑던 눈은 다시 앞을 향했다. 지익, 바닥에 구두가 끌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준비는 몇 달이나 걸렸다. 계획을 세우고, 거취 할 곳을 찾고, 이용할 돈과 이동수단까지 모두 정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에 몇 달이나. 그럼에도 그는 제 노력을 전부 비웃듯 고작 며칠 만에 저를 찾아냈다.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출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해야 하나.



 쿠로오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익숙한 방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돌아왔다. 돌아왔다 말하기도 싫지만. 쿠로오는 욱신거리는 제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몸 여기저기를 움직여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기절하기 전 복부를 맞은 거 말고는 통증이 있는 부위가 없었다. 단순히 씻기고 옷만 갈아입힌 채 방에 놔둔 모양이었다. 쿠로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을 깜빡였다. 무거운 발목을 내려다보자 굵직한 족쇄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잠이 아닌 기절을 했던 탓인지 머리칼이 축 쳐져 시야를 가렸다. 쿠로오는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걸을 때마다 복부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는 건 익숙했다. 저가 깨고 나갔던 창문은 멀쩡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가볍게 유리를 두드리자 둔탁한 촉감이 느껴졌다. 유리의 재질을 바꿨다. 좁은 우리 안에 갇힌 햄스터가 된 기분이었다.






 “일어나셨어요?”






 뒤에서 말을 걸어왔지만 쿠로오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달칵,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가 나고 인기척이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입으로 가져갔다. 초조하게 입술을 뜯고 있자 등 뒤에서 손이 뻗어져 나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깨에 턱이 걸쳐진 듯 조금은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익숙한 체취가 코끝을 맴돌았다. 투둑, 손끝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흘깃, 손을 내려다보자 벌겋게 피가 묻어났다.






 “또 입술 물어뜯었죠.”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성큼 다가와 제 손을 채갔다. 피가 묻은 손끝을 핥아내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피는 전부 지워졌을 텐데도 제 손가락을 사탕이라도 녹이듯 녹진하게 핥는 것에 쿠로오는 손에 힘을 주어 잡힌 손을 빼냈다. 축축한 손가락 끝을 바짓단에 문지르기 무섭게 턱이 잡혀 뒤로 돌아갔다. 미적지근한 혀가 입술을 핥아냈다. 흠칫, 몸을 뒤로 뺀 것이 무색하게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쉽게 풀어졌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런 행동들뿐이었다. 그 사이에 틈은 없었다. 그게 더. 쿠로오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려다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아냈다. 혀끝에 아릿한 쇠 맛이 퍼져나갔다. 쿠로오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접시를 한 번, 그 옆에 서서 저를 보고 있는 남자를 한 번 보곤 걸음을 떼었다. 무작정 남자를 거절하는 것은 남자에게도, 저에게도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쿠로오는 침대 위에 앉아 남자가 내미는 것에 입을 벌렸다.






 “멍이 좀 크게 들긴 했는데, 장기에 문제가 있진 않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음식은 부드러운 걸로 준비했어요.”






 입에 맞으세요? 저를 보는 시선에도 쿠로오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다시 음식이 입 앞에 놓여, 쿠로오는 다시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음식을 덜어내는 소리와 저가 저작운동을 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침묵뿐인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마지막 한 점까지 먹고 나서야 달그락거리던 소리는 멈추었다. 쿠로오는 제 쪽으로 내밀어지는 컵에 물을 몇 모금 삼키고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남자는 저가 도망친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돌아와서 얘기하자며. 입 안에 텁텁한 음식의 느낌에 쿠로오는 물을 몇 모금 더 삼키고 제 쪽으로 내밀어지는 손에 컵을 들려주었다.






 “누워보실래요? 배 좀 봐요.”






 저가 기절해 있는 동안 씻기고, 옷도 갈아입히고, 의사에게까지 보였으면서도 태연스레 저런 말을 한다. 불퉁한 마음이 들었지만 쿠로오는 순순히 침대 위에 누웠다. 단정한 손끝이 제일 아래쪽부터 톡, 톡, 단추를 풀어나갔다. 슥,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이 올라왔다. 미묘해지는 기류에 쿠로오는 시선을 천장에 두었다. 지겨운 패턴. 명치 즈음에서 얼쩡대던 손이 멈추고, 옷깃이 옆으로 벌어졌다.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 제 배를 보았다. 몇 달간 제대로 햇빛을 보지 못해 희게 질린 살결에 물감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얼룩덜룩하게 멍이 들어있었다. 단정한 손이 멍 위를 가볍게 쓸어냈다. 옅은 통증이 느껴졌다.






 “멍이 좀 심하게 들었네요.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제 쪽을 보는 파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쿠로오는 들었던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배를 쓰다듬는 손이 조금 더 넓은 부위를 쓸어냈다. 손의 온도는 조금 차가운 것도 같았다. 배를 쓰다듬던 손이 위로 올라와 뺨을 살짝 쓸었다. 열이 조금 있네요. 뺨을 더듬어 내린 손이 목줄기를 쥐었다. 다른 손이 머리 옆에 짚어지고, 그대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쪽, 쪽, 느릿하게 입술을 몇 번 빨았다 떨어진 입술이 완벽히 겹쳐지고, 그대로 혀가 파고들었다. 슥, 바닥을 짚고 있던 무릎마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집요한 키스였다. 혀 놀림 하나, 호흡 하나까지 전부 통제하겠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비틀려 하자 덥썩, 머리칼이 잡혔다. 쿠로오는 눈썹을 찡그렸다. 숨을 쉬기 위해 조금 더 벌어진 입술마저 전부 삼켜졌다. 으응, 흐, 응.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몸을 들썩거려도 제 위에 올라탄 몸 탓에 반항이 쉽지가 않았다.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흐윽, 읏, 으, 응, 푸하, 하, 아카아, 읏!”






 짧게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바짝 붙어왔다. 침대 시트만 움켜쥐었던 손은 제 목을 잡은 팔을 쥐고 손톱을 세웠다. 혀가 온통 입 안을 전부 채우고 입술을 물어 뜯어낼 것처럼 굴었다. 검붉게 멍이 든 배 위로 문질러지는 것에 쿠로오는 있는 힘껏 제 위에 올라탄 몸을 밀어냈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쿠로오는 헉, 헉,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헉, 흐으, 하, 미친, 하아, 이 미친 새끼야.”

 “……보고 싶었어요.”






 뻗어온 양 손이 벌겋게 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쓸어냈다. 쿠로오는 금세 무표정한 가면을 덧쓴 얼굴을 노려보았다. 숨이 쉽게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이 그대로 위로 올라와 뒤통수를 감쌌다. 이마가 맞닿아 호흡이 닿았다.






 “돌아가 버린 줄 알았어요.”






 갈 곳도 없는데. 쪽, 느릿하게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쿠로오는 잘근, 제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다 당신이 찾을 수 없을 만큼 부숴 놨는데.”






 이마에서 떨어진 입술이 눈꺼풀 위에 닿았다.






 “내가 그렇게 해놨는데. 웃기죠.”






 눈꺼풀에서 떨어진 입술이 쪽, 가볍게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웃기죠,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정작 본인도 웃지를 않았다. 쿠로오는 제 바로 앞에서 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를 밀어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뒤통수를 감싸 쥐고 있던 손 하나가 제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 위로 겹쳐졌다.






 “당신은 그 어디도 갈 수 없는데, 금방이라도 어디로 또 도망가 버릴 것 같아.”






 손을 움켜쥔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쿠로오는 고통에 눈을 찌푸리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퍽, 제 앞에 놓인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다행스럽게도 제 위에 올라타 있던 몸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로오는 본인이 쳐 놓고도 얼얼한 주먹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호흡이 불규칙하게 드나들었다. 쿠로오는 비틀대며 침대에서 일어나 벽으로 몸을 붙였다.






 “내가, 씨발, 왜 어디도 갈 수 없어.”

 “……제가 그렇게 할 거니까요.”






 퉤. 조금 어긋난 것 같은 턱을 맞추던 남자가 뱉어낸 것 시뻘건 색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멀쩡한 얼굴로 일어난 남자는 맞은 뺨을 한 번 손등으로 문지르곤 쿠로오의 앞에 섰다. 분명 저보다도 큰 키 일 것이 분명한데도 눈을 맞추자 잔뜩 움츠린 탓인지 고개를 조금 숙여야 했다. 남자는 웃었다.






 “네코마도 부쉈고, 당신의 가족들은 죽였고, 친구들도 모조리 당신이 갈 수 없는 바닥까지 전부 밀어 넣었어요. 원한다면 하나하나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알려드릴 수도 있어요.”

 “아카아시…….”

 “굳이 알려드리지 않아도 다 보셨겠지만.”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있던 웃음이 짙어졌다. 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눈동자가 완벽하게 깨어진 것을 보는 쾌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선에 아카아시는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가 품 안 가득 그를 끌어안았다. 처음 안았을 때보다도 마른 몸은 이제 이렇게 얌전히 품에 안기기도 했다. 아까 맞은 뺨을 그 머리에 기대며 아카아시는 물기가 말라 부슬거리는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먹었으니까 좀 잘까요?”






 제 물음에 대답은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아카아시는 더 움츠러드는 몸을 안은 채 침대로 향했다. 스릉, 발목에 연결된 사슬이 바닥에 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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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오고 있었다.



 쿠로오는 축축이 젖은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으아, 소리를 한 번 내질렀다. 소리를 지른다고 더위가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치고 오르는 짜증을 표출이라도 해야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평소엔 전혀 아무 생각이 없던 앞머리가 유난스레 짜증이 났다. 완전히 젖은 것이 아닌 앞머리는 귀찮을 정도로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 땀방울이 떨어지는 앞머리를 몇 번 쓸어 올리던 쿠로오는 결국 포기를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바람이 불면 퍽 시원했기 때문에 에어컨은 켜주지 않아 뛰는 운동을 하는 저는 마냥 더울 따름이었다. 쿠로오는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유난히 덥고 지치는 날이었다.






 “쿠로오 상!”

 “으응-, 먼저 시작해.”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손을 대충 내저은 쿠로오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도저히 훈련을 이어갈만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결국 쿠로오는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물통을 입에 물었다. 3학년 주장의 특권으로 하루쯤은 노닥거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물통을 몇 번 빨던 쿠로오는 그 물조차 미적지근해 몇 모금 넘기지 않고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진정된 호흡에 쿠로오는 그나마 냉기가 도는 벽에 등을 기대며 이리저리 뛰는 부원들을 보았다. 입학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상태라 처음 그 오합지졸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 1학년들은 더 훈련의 성과도가 좋았다. 물론 리에프는 예외였지만. 제 쪽으로 던져진 공을 결국 안면으로 받아내는 리에프를 보며 쿠로오는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사자 군 여전하네. 아니, 호랑이였던가?”

 “악! 뭐야!”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옆을 보았다. 시원하게 위로 싹 올려버린 회색 머리가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제 쪽을 보며 씩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하, 웃으며 이마를 덮은 제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보쿠토?”

 “보고 싶어서 왔어, 쿠로오.”






 제 쪽으로 쓱 뻗어지는 손에 쿠로오는 킥킥 웃으며 그 손을 잡고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켰다. 훅,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받아.”

 “땡큐.”






 휙 던지는 것을 공중에서 낚아챈 쿠로오는 바로 느껴지는 시원함에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뺨에 댔다. 서늘한 알루미늄 캔의 감촉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뺨에 닿아 열기를 조금 식혀주었다. 쿠로오는 캔을 뺨에 굴리며 먼저 벤치에 앉아 캔을 따는 보쿠토의 옆에 앉았다. 오는 길이 제법 더웠는지 벌컥벌컥 음료를 들이키는 시간이 퍽 길었다. 쿠로오는 그것을 보다 저도 캔을 따 한 모금 머금었다. 탄산 특유의 톡 쏘는 시원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연이어 몇 모금 꿀꺽꿀꺽 삼켜낸 쿠로오는 흘깃, 제 옆에 앉은 보쿠토를 보았다. 보쿠토는 탄산 탓에 목이 따가운 지 크으, 고개를 흔들어댔다.






 “근데 진짜 왜 왔어?”

 “너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징그럽게.”






 장난스럽게 고개를 쓱 들이밀며 하는 말에 쿠로오는 똑같이 키득대며 몸을 뒤로 뺐다. 가까이 앉은 탓에 팔의 맨살이 맞닿았다. 어느 새 땀이 식었는지 맞닿는 팔이 부드러웠다.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여름처럼 후덥지근했던 체육관 내부와는 달리 바깥은 연신 바람이 불어 벤치에 앉아있으니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남은 음료를 전부 마셔 빈 캔을 휴지통으로 던져 넣은 보쿠토는 캔이 골인하자 예에-, 하며 쿠로오에게 몸을 기댔다. 쿠로오는 익숙하게 몸을 뒤척여 보쿠토가 기대기 편하도록 했다. 3년째 알고 지내다보니 이런 것들도 아무렇지도 않아진 지 오래였다. 쿠로오도 캔을 비워내 휴지통에 던져 넣고 몸을 조금 뒤로 젖혔다. 하늘이 조금 파래졌고, 괜히 가슴을 간질이던 분홍빛의 나무들도 어느 새 초록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확실히 여름이 오고 있구나. 쿠로오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근데, 진짜야.”

 “응?”

 “진짜 너 보고 싶어서 왔다고.”

 “뭐야, 쿠로오 씨는 비싸답니다?”






 키득키득 장난으로 대꾸를 했지만 그에 대답은 없었다. 쿠로오는 고개를 숙여 제 몸에 기댄 보쿠토를 내려다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낯짝을 기대했건만, 사뭇 진지한 눈빛이 저를 향했다. 쿠로오는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마주치고, 멀리서 신발과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와 공이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짱을 낀 채였던 팔이 풀리고, 조금은 뜨겁게 열기를 품은 손바닥에 허벅지를 짚었다. 쓱 다가온 얼굴이 가까웠고, 툭, 이마가 닿았다. 몸이 꼭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깜빡, 간신히 움직인 눈꺼풀이 잠시 시야를 가렸다. 다시 활짝 밝아진 시야엔 씩 웃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눈은 왜 감냐?”

 “……야이씨! 뭐 이딴 장난을 하냐!”

 “뭐야, 속았어?”






 아하하하, 시끄럽게도 웃는 소리에 쿠로오는 홧홧한 뺨을 손등으로 한 번 문질렀다. 코타로 군한테 속다니, 분하다. 장난스레 이를 갈며 하는 말에 보쿠토는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닿아있던 살갗들이 전부 떨어졌다. 오늘 훈련 없어? 멍하니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운동장을 보며 하는 말에 어엉-, 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려 다리를 떨던 쿠로오는 흘깃, 제 옆을 보았다. 보쿠토의 회색 머리칼이 바람에 조금 흩날렸다. 마치, 수면에 반사되는 빛과 같은 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그 머리칼을 헝클인 쿠로오는 그대로 팔을 내려 보쿠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 머리 망가져!”

 “아이고, 우리 보쿠토 군, 형아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나요?”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키득키득 웃자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는 손이 뜨끈했다. 원래 이렇게 열이 많았었나,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곧 쿠로오는 고개를 까닥였다. 늘 열이 많다 못해 넘쳐 여기저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것이 보쿠토였다. 내내 힘든 훈련을 했던 탓인지 잠깐 쉬었다고 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어깨를 감쌌던 팔을 풀고 몸을 바로 세웠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도 스륵, 떨어져나갔다.






 “나 이제 들어 가봐야 해. 잠 온다.”

 “벌써?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니까 다음엔 말 좀 하고 오세요, 보쿠토 군?”






 에이. 찌푸려지는 얼굴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미묘한 이질감이 피어올랐다. 원래 이랬던가. 쿠로오는 가슴께를 문질렀다. 몸을 일으키자, 저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 시야의 끝에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벚꽃을 지금 다시 본 것 같은 기분. 체육관의 앞에서야 쿠로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저를 따라오던 보쿠토가 살짝 부딪쳤다.






 “어디까지 오게? 연습 못 한 게 아쉬워서 여기까지 오는 거야?”






 앗차, 하면서 뒷걸음질 치던 보쿠토는 마주 킥킥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며 쿠로오는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가슴이 답답한 것도 같고.






 “이만 들어갈게.”

 “저기, 쿠로오.”






 응? 제 손목을 잡는 손이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체육관 문 옆으로 몸이 당겨져 비틀, 걸음이 꼬였다.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끝이 보였다. 소리도 없이 뺨에 꾹,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꼬였던 걸음이 제대로 다시 서게 되고, 잡혔던 손목은 놓였다.






 “다음에 또 보자!”






 성큼 뒤로 빠졌던 몸이 손을 흔들고 그대로 도망치듯 저만치 뒤통수가 멀어졌다.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눈만 깜빡거렸다.






 “뭐야, 이게…….”






 미쳤나봐……, 보쿠토 미친 놈……. 보쿠토가 사라진 교문 쪽을 보며 쿠로오는 미쳤다는 말만 중얼댔다. 후끈거리는 목덜미를 스쳐지나간 바람이 퍽 시원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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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소리가 났다. 아카아시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투둑투둑,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아카아시는 시선을 돌렸다. 벌써 새벽 2시였다. 지독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마른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다가가자 여름이 제법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비 탓인지 꽤나 서늘한 기운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유리창에 손끝을 올리자 차가운 온도가 느껴졌다. 그 찬 기운이 옮은 손가락으로 열이 오르는 뺨을 쓸어내리자 선뜻한 기분이 들었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잠을 자지 못해 지끈거리는 머리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보다 발을 떼었다. 잠이 오지 않는데 누워서 끙끙대는 것도 무의미한 것 같았다.


 거실로 나온 아카아시는 물을 몇 모금 마신 후 소파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차가운 가죽 소파의 감촉이 뻣뻣해졌던 몸을 조금 풀어주는 것 같았다. 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 시원함이 퍽 달가웠다. 뺨만 후끈거리는 줄 알았건만 목덜미며 복부까지도 뜨끈한 열기가 한 가득이었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아카아시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며칠 전 흠뻑 비를 맞은 이후 줄곧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싶더니,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보쿠토 상이 저가 없는 훈련을 견딜 수 있을까. 상상해 보았지만 다다른 결론은 썩 좋지 못했다. 미간을 좁혔던 아카아시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약이라도 미리 먹어두면 괜찮을까 싶었다. 어둠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아카아시는 문득 장식장 위에 놓인 사진에 걸음을 멈추었다. 싸구려 액자 속에 들은 세 사람.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치워야 하는데. 생각만으로 끝나는 것은 여전했다.





















 헤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와 있던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왜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는가. 후회를 하고 있으면 결론은 늘 역시 그 사람 탓이다, 라고 끝이 났다. 그랬다. 전부 쿠로오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 없는 삶을 떠올릴 수도 없게 된 것은. 쿠로오와 친분이 생긴다는 것은, 쿠로오가 삶 자체에 스며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보다 먼저 쿠로오와 알고 지낸 보쿠토도 그랬다.






 ‘쿠로오 없을 땐 어떻게 개인 훈련 했냐고? 어……모르겠어. 기억 안나!’






 그 땐 단순히 그 단순한 머리가 기억을 못한다고만 생각을 했었다. 그 때 그 이야기를 같이 들은 쿠로오도 낄낄 웃으며 보쿠토를 타박했다. 이 멍청아. 그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건만 자신 또한 보쿠토와 다를 것이 없었다. 쿠로오가 없었던 그 옛날엔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쿠로오가 자신의 삶에 스며있을 때였다.






 ‘아카아시.’






 저를 보며 활짝 웃는 얼굴이 햇빛 같았고 달빛 같았다. 그런 그를 보면 그런 걱정 정도는 아무래도 좋았다. 놓치지 않고, 그가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제 쪽을 향해 뻗어진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바짝 깍지를 껴잡는 것이 익숙해진 채였다.





















 쿠로오와의 관계가 단순히 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니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늘 보쿠토를 껴서 셋이 만나 왔건만, 보쿠토가 일이 생겨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배구를 하고 싶다며 낑낑대는 것을 달래놓고 그냥 돌아가야 하나, 고민을 할 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쿠로오였다.






 ‘아카아시, 너희 집 여기서 가깝지 않아?’

 ‘네. 5분 정도.’

 ‘그럼 너희 집에서 신세 좀 지자. 더워서 바로 집 가기 싫어.’






 제 집도 그다지 시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그의 집까지 가는 거리를 생각하던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슈퍼에서 그가 사준 아이스크림까지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크게 시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보단 훨씬 나았다. 사내 둘이서 뭘 하나 싶었다. 보쿠토와 있을 땐 혼자서도 잘 떠드는 보쿠토 덕분에 침묵과 싸우지 않아도 괜찮았었지만, 쿠로오는 아니었다. 보쿠토와 어울려 장난을 치는 것에 쿠로오 또한 비슷할 것 같았건만 쿠로오는 생각보다 말이 크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저도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으니 어색한 침묵만 계속되었다. 단 둘이 있는 것이 처음이었다.






 ‘우리끼리 있는 거 처음이네.’

 ‘……그러게요.’

 ‘보쿠토 있을 땐 엄청 시끄러웠는데. 그치.’

 ‘네.’






 입 안이 바짝 말라갔다. 그다지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가 던지는 말들에 적당히 대답해주면 되는 것을, 유난히도 대화가 뚝뚝 끊겼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대화에 머리칼을 한 번 쓸어 올렸을 때, 제 옆으로 그가 성큼 얼굴을 내밀었다.






 ‘너 좋은 냄새 난다.’

 ‘……씻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나는?’

 ‘딱히…….’






 쑥 다가온 얼굴이 묘했다. 아.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의 표정은 어땠던가. 웃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고, 무표정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깨 위로 올라온 손이 뜨거웠다. 더워. 그런 생각이 들었음에도 눈을 내리깔고 그대로 부딪쳐오는 입술에 제 입술을 뭉갰다. 더위에 조금 까끌한 표면이 젖어들자 금세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말캉한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은 것은 자신이었다. 왜 그랬나. 되 물어봐도 딱히 이유는 없었다. 입술이 맞닿았고, 상대는 쉽게 입술을 벌렸다. 혀는 쉽게 엉켰다. 아이스크림의 단맛이 타액에 섞여 넘어왔다. 어깨 위에 있던 손이 어느새 뒤통수를 감싸고 있었다. 바짝 밀착한 가슴팍이 뜨겁고 더웠다. 그럼에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쪽, 쪽, 떨어질 듯 멀어졌던 입술은 방향을 틀어 다시 깊게 맞물렸다. 기갈이 난 사람처럼 서로의 혀를 놓아주지 않았다. 먼저 입술을 떨어뜨린 것은 자신이었다. 헉헉 부족했던 숨을 몰아쉬며 그의 눈을 보았다. 똑같이 헐떡이는 그는 평소와 똑같이 웃었다.






 ‘처음, 아니지.’






 입가로 흘러내린 타액을 옷소매로 훔쳤다. 반들하게 젖어 붉게 부르튼 입술이 자꾸만 시야에 걸려들었다. 얼굴이 자꾸만 달아올랐다.





















 그 후로 보쿠토를 빼고 몰래 만나는 날이 늘어났다. 대부분 제 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서로 서로를 만지지 못해 안달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입을 맞추거나, 서로를 끌어안는 다던가, 그 무엇도 하지 못하면 손이라도 잡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둘이 있는 날이 늘어나며 배구 연습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연습 경기 도중 하는 실수가 늘어나진 않았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실력은 제자리였다. 제 눈에도 그게 보일 정도니 제 토스를 받는 보쿠토는 더 예민하게 눈치 채고 있었다.






 ‘아카아시, 뭔가, 지루한 것 같은데?’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으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보쿠토는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예민하고 솔직했다. 지금은 보쿠토만 눈치 챘지만, 앞으로는 모두가 알아차릴 것이었다. 배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연습 시간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쿠로오와의 시간을 줄인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전엔 어떻게 지냈더라. 떠올리려 했지만 이미 까맣게 잊은 채였다.





















 ‘쿠로오 상은 배구하기 전에 뭐 했어요.’






 조급함을 느낀 날에도 똑같이 쿠로오를 만났다. 제 침대에서 익숙한 듯 뒹굴던 쿠로오는 그 물음에 흘긋, 저를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손은 맞잡은 채였다.






 ‘난 애기 때부터 배구 했어.’

 ‘조기 교육 같은 건가요.’

 ‘그냥, 내가 좋아서.’






 뒹굴, 마른 몸이 구르며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비어버린 손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내내 눈을 떼지 못하던 만화책에서 눈을 뗀 쿠로오는 몸을 일으켜 제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허벅지 위에 앉은 쿠로오는 제 양 뺨을 쥐고 쪽쪽 짧게 입을 맞추곤 몸을 일으켰다.






 ‘당분간 시험기간이라 못 와.’

 ‘네.’

 ‘너도 잘 보고.’






 연락할게. 휘어지는 눈매에 고개만 끄덕였다. 마주 잡고 있던 제 손이 후끈거렸다.





















 연락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쿠로오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가 사라진 생활이 어색했다. 원래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었으니 시험공부를 했고, 그 동안 쿠로오에게 밀려있던 배구 연습을 했다. 무엇이든 썩 즐겁지가 않았다. 늘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진짜 나 왜 이러지. 자책을 해 보아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어영부영 시간이 지났다. 쿠로오에게서 연락은 시험이 끝나는 날 왔다.






 ‘놀러 가자. 보쿠토랑 같이.’






 보쿠토에게 보내도 될 메시지를 저에게 보냈다. 근데 왜 보쿠토 상이랑 같이. 두 가지의 상반된 감성이 마음속에서 충돌하고 휘몰아쳤다. 하지만 애써 덮어둔 채 알겠다고 답장만 했다. 불안감이 생겨났다. 저와 쿠로오만 지내던 시간에 다시 보쿠토가 섞여들었다. 보쿠토가 있던 시간들은 어땠더라. 그 때의 쿠로오는 어땠지. 바로 얼마 전인데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뇌에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쿠로오가 끌고 온 곳은 놀이공원이었다. 시커멓고 키만 큰 남자 셋이 뭣하러 놀이공원까지 오나 싶었지만, 보쿠토와 쿠로오 둘 다 꽤나 들떠보였기에 장단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놀이기구를 못 타는 편은 아니었다. 보쿠토는 놀이 기구를 발견할 때마다 타자며 저와 쿠로오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쿠로오와 저는 그 장단을 맞춰주었다. 충분히 재미있었고, 충분히 유쾌한 하루였음에도 이질적인 기분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시간이 늦을 때까지 실컷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다 가장 먼저 지친 것은 쿠로오였다. 잠깐 쉬었다 가자며 저를 끄는 것에 아이스크림을 사 벤치에 앉았다.






 ‘아 진짜 보쿠토.’

 ‘진짜 재밌어!’

 ‘그래, 재밌었지. 난 토할 뻔 했고.’






 바이킹 재미있다고 다섯 번 연속으로 타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속이 좋지 않은지 가슴께를 툭툭 두드리는 손에 아카아시는 가방에서 물을 꺼내 쿠로오에게 내밀었다. 익숙하게 받아든 쿠로오는 꿀꺽꿀꺽 물을 삼켜냈다. 스친 손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아이스크림에 입술을 묻었다. 끈적거리는 단맛이 혀에 배어들었다. 어딘가 붕 뜬 것 같은 느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왤까.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내미는 물병을 돌려받고 입술을 묻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웠다. 달고, 텁텁했다.






 ‘늦었으니까 이만 가자.’

 ‘왜?! 더 놀고 싶어!’

 ‘다음엔 애인이랑 오셔.’






 낄낄 웃으며 하는 말에 보쿠토는 아, 쿠로오! 하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아카아시는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다. 애인이랑. 흘깃, 쿠로오를 보았지만 쿠로오는 보쿠토와 말장난을 하느라 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급격히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 우리 사진 찍자, 사진.’






 애들한테 자랑하자. 말을 꺼낸 것은 쿠로오였다. 둘을 찍어줄 생각이었건만, 쿠로오는 제 팔을 당겨 옆에 앉게 했다. 보쿠토가 제 옆에 앉으며 졸지에 가운데 앉게 되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찰칵, 사진이 찍혔다. 자기가 눈을 감은 것 같다며 다시 찍자고 하는 보쿠토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쿠로오는 휴대전화를 흔들어보였다. 내일 보내줄게. 이를 드러내며 짓는 웃음에 아카아시는 한 손으로 양 뺨을 쥐었다. 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중간에 보쿠토와 먼저 헤어진 후 쿠로오와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그 긴 시간동안 무엇을 했나,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손을 잡고, 끌어안고, 몇 번의 입맞춤을 나눴을 뿐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았다. 본래도 그다지 말을 많이 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난히. 이상하게도. 빗방울이 한두 방울 툭툭 떨어질 때 쯤, 쿠로오는 제 몸을 껴안은 팔을 풀었다.






 ‘이만 가자.’






 정작 제 품에서 얼굴을 떼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은 것은 쿠로오 자신이면서, 쿠로오는 애써 손을 떼었다. 그것에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잡은 손마저 놓고 앞서서 걸어가던 쿠로오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아참. 뭔가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춘 쿠로오에 아카아시는 저도 걸음을 멈추었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쿠로오는 아카아시의 품에 뭔가를 턱 하니 안겨 주더니 활짝 웃으며 먼저 총총 뛰어갔다.






 ‘선물이야!’






 멀어지는 쿠로오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품에 안겨진 것을 확인했다. 액자였다. 아마 아까 놀이공원의 기념품 가게에서 산 것 같았다.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동물 캐릭터가 붙어있었다. 감촉이 까끌거렸다. 입술을 꾹 다물며 가방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뺨이 뻐근해질 정도로 당겨질 것 같았다.





















 다음 날 쿠로오가 준 사진을 끼워 넣어 거실의 장식장에 올려두었다. 저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활짝 웃고 있는 보쿠토와 쿠로오가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었었나, 하고 보니 저는 의외로 어떠한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괜히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나름대로 어떤 표정을 짓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평소에도 이런가 싶었다. 괜히 입꼬리를 조금 당겨보다 그만 두었다. 마냥 어색한 것만 같았다. 액자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다 몸을 돌렸다. 귀 끝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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