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훈련이 없는 날이었다. 주장인 저가 제일 먼저 알았어야 했지만 수업 시간, 쉬는 시간 할 것 없이 퍼질러 잤던 탓에 부주장인 아카아시가 종례시간이 다 되어서 알려주러 왔었다. 그 한심하다는 눈빛과 한숨에 딱히 할 말이 없어 턱에 흐른 침을 닦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훈련이 왜 없는 지에 대해서도 알려줬건만, 딱히 귀 담아 듣지 않았기에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보쿠토는 발에 차이는 돌에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 새 네코마 고교 앞이었다. 생각보다 조금 더 돌아 왔나보다. 보쿠토는 머리를 조금 긁적이다 단 위로 올라가 울타리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배구부 애들은 체육관 안에 있으려나, 구경이나 갈까, 따위를 생각하던 보쿠토는 뒤에서 엉덩이를 팍 치는 것에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악!!”
“여기서 뭐하냐?ㅋㅋㅋㅋㅋ”
“와, 씨! 욕 할 뻔 했어!!”
“변태도 아니고 남의 학교를 왜 들여다보고 있어.ㅋㅋㅋㅋㅋㅋ”
낄낄대며 웃는 얼굴에 보쿠토는 마구 뛰는 가슴을 꾹 누르며 머뭇머뭇 단 위에서 내려왔다. 쿠로오 뿐만 아니라 네코마 부원들도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보쿠토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쿠로오에게 걸린 것도 최소 한 달치 놀림감이건만 뒤늦게 도착한 애들은 배가 찢어져라 웃고 있는 쿠로오와 머쓱하게 서있는 저를 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야, 그만 웃어.”
“아 진짜 존나 웃겨.”
“너 훈련 중 아니냐?”
“아 맞긴 한데. 너희 먼저 들어가 있어라, 나 좀 이따 들어갈게.”
아직 웃음의 여운을 갈무리하지 못한 쿠로오가 끅끅대며 손을 내젓자 다른 부원들은 어깨를 으쓱, 하곤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쿠로오는 웃느라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닦아내곤 보쿠토의 어깨에 척하니 팔을 올렸다. 축축한 체취가 훅 밀려들었다.
“자,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학교 교복 입고 들어가도 되나?”
“누가 뭐라 하겠어?”
제 어깨를 당기는 손에 보쿠토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교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고작 교문 하나일 뿐인데도 뭔가 기분이 미묘했다. 후쿠로다니 학원의 교복을 입고, 네코마 안에 있는 자신. 보쿠토는 흘깃, 쿠로오를 보았다가 그저 걸음을 옮겼다. 아래로 늘어뜨린 손이 조금 아쉬웠다.
“뭐 마실래? 아, 나 지갑 없다.”
“사달라는 거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주머니를 뒤적이자 쿠로오는 미안하다며 낄낄 웃었다. 마주 웃은 보쿠토는 콜라를 두 개 뽑아 벤치에 앉았다. 시원하다며 캔을 뺨에 댄 쿠로오는 그렇지 않아도 러닝 탓인지 양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쿠토는 그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캔을 땄다. 치익-, 퍽 시원한 소리가 났다.
“그나저나 웬일?”
“그냥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쿠로오 씨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뭐래.”
팔을 주먹으로 가볍게 툭 치자 쿠로오는 낄낄 웃었다. 몇 모금 꿀꺽꿀꺽 삼켜내자 목구멍이 따가워지며 더위가 훅 가시는 것 같았다. 여름이 다가오며 낮이 길어지는지 수업이 끝나고 왔음에도 아직 해는 아직 중천이었다. 고개를 뒤로 꺾자 보이는 나무는 몇 주 전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슴을 간질여 놓더니 벌써 녹음으로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곧 있으면 매미의 울음소리도 들릴 것이었다. 진짜 여름이다. 보쿠토는 눈을 가늘게 뜨다 제 어깨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촉감에 몸을 뒤척여 제 어깨를 내주었다. 치익, 뒤늦게 캔을 따는 소리가 났다.
“오늘 훈련 없어?”
“엉. 아카아시가 없대.”
“주장은 너인데 왜 네가 모르냐.”
후배한테 떠넘기면 안 되지. 피식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보쿠토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남은 콜라와 함께 삼켜냈다. 목이 따가웠다. 가깝게 밀착한 몸 탓에 스치는 팔은 어느새 땀이 식어 끈적거리지 않고 보송보송해져 있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기울여 제 어깨에 기댄 머리 위에 뺨을 기댔다. 쿠로오의 키가 저보다 조금 더 큼에도 이 자세가 편할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편해졌는가. 쿠로오에 관한 것이라면 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력이 더 좋지 않아졌다. 보쿠토는 기억을 더듬느라 눈을 가늘게 떴다가 그 머리에 기댄 뺨을 문질렀다. 만지지 않아 조금은 까끌한 머리칼의 감촉에 뺨 아래 뭉개졌다.
“이렇게 농땡이 피워도 돼?”
“뭐 하루쯤이야 어때. 너희도 쉬는데.”
“그렇긴 하지만.”
괜히 손에 든 빈 캔을 구겨 휴지통에 던져 넣은 보쿠토는 눈만 굴렸다. 앞으로 모은 손을 까닥까닥 하던 보쿠토는 손을 뒤로 뻗어 제게 머리를 기댄 쿠로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약간 긴장했지만 손은 쳐내지지 않았다. 진즉에 이럴 걸. 보쿠토는 괜히 손에 쥐어지는 땀을 바짓단에 문질러 닦았다. 손아귀에 들어온 어깨는 생각보다 넓었고, 따뜻했으며, 마른 탓에 단단했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눈앞의 까만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축축했던 땀 냄새는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체취가 올라왔다. 뺨을 기댄 머리가 뒤척였다.
“나 좀 졸린 것 같다.”
“너희 언제 끝나는데?”
“음, 글쎄. 애들 다 가고 나서야 내가 가겠지?”
“주장이네.”
어깨를 안고 있던 손을 올려 머리를 흐트러뜨리자 킥킥 웃음이 터지며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가 떨어졌다. 아쉬움이 가슴께에 들썩거리다 가라앉았다. 정말 졸음이 오는 지 머리를 몇 번 털어낸 쿠로오는 여태 손에 들고 있던 콜라를 비워내고 캔을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었다. 꽤나 큰 소리를 내며 캔이 골인하자 쿠로오는 예에, 하며 몸을 일으켰다. 쭉 기지개를 펴느라 티가 올라가 허리가 슬쩍 드러났다 가려졌다. 멍하니 그 허리를 보던 보쿠토는 그 허리가 틀어지는 것에 고개를 들었다. 장난기 가득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어이, 변태 씨. 지금 어디 보는 거?”
“ㄴ, 내가 뭘!”
“진짜 봤어? 반응이…….”
“안 봤어!”
낄낄 웃는 소리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 진짜.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고개를 숙이자 제 머리칼을 북북 쓰다듬는 손이 느껴졌다. 형이 다 안다.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보쿠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숙였던 고개를 바로 들자 능글맞게 웃고 있는 얼굴이 마주했다. 의자 위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주워 매며 보쿠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그대로 내려와 뺨을 가볍게 쓰다듬고 떨어졌다. 손가락이 두드리고 간 자리가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가게?”
“너 부 활동 해야지. 이만 갈게.”
“응, 뭔가 아쉽네.”
그러면서도 굳이 잡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보쿠토는 어깨를 으쓱, 하곤 쿠로오의 등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농땡이 피우지 말고. 그러며 씩 웃자 마주 씩 웃으며 팔이 척 허리에 감겨왔다. 교문까지만 같이 가줄게. 반바지를 입은 탓에 쭉 뻗은 다리가 쑥 앞으로 성큼 내딛어졌다. 보쿠토는 못이기는 척 걸음을 옮겼다.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조금 더 같이 있는 거니까. 교문까지 오면서도 둘 사이의 대화는 없었다. 운동장에서 다른 운동부가 소리치는 것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교문에 도착해 보쿠토는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손아귀 가득 쿠로오의 체온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아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진짜 간다.”
“연락해. 다음엔 부 활동 없는 날에 오고.”
어깨를 툭 친 손이 살랑살랑 눈앞에서 흔들렸다. 보쿠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 애들 기다려. 솟아오르는 아쉬움을 애써 가라앉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몸을 돌리려는 찰나, 허공에서 흔들리던 손이 덥석 잡혔다.
“아쉽지.”
씩 웃고 있는 얼굴에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 하다가 성큼 제 손을 끌어당기는 것에 앞으로 한 걸음 끌려갔다. 얼굴이 퍽 가까워졌다. 보쿠토는 제 손을 움켜쥔 손을 잡았다. 어느새 달아오른 손은 꽤 뜨거웠다. 손을 쥐지 않은 손이 어깨를 쥐고, 좀 더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얼굴 옆을 배회했다. 숨결이 살갗을 간질였다. 어느새 떠밀린 몸이 교문의 기둥에 등이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꾹 눌렸다 금세 떨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밀착했던 몸은 멀어졌다. 보쿠토는 멍한 표정으로 제 뺨을 감싸 쥐었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건만, 양 뺨이 아까 러닝을 하고 난 직후처럼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있었다. 훅 열기가 올라왔다.
“잘 가.”
“어, 어어…….”
교문까지 왔을 때의 느릿했던 걸음과는 달리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퍽 빨랐다. 멀어지는 뒤통수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툭, 어깨에 걸쳐져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화끈거렸다. 간질거리기만 했던 가슴이 쿵쿵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열기 탓에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허공에 흔들거리던 손이 절로 입가로 다가왔다.
“난 몰라…….”
빨간 반바지가 사라질 때까지, 보쿠토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시원하게만 느껴졌던 바람이 여름바람처럼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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