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_져도로_시작하는_글쓰기 태그 이용했습니다
해가 져도 쿠로오는 오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현관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죄 없는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손에 꽉 움킨 휴대전화의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금세 그 나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건만, 아카아시는 그 휴대전화를 몇 번 주무르기만 할 뿐 그 화면조차 켜지 않았다. 사실 무서운 것이었다. 그 나른한 목소리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섞여 들릴까봐. 치졸한 감정이었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아카아시는 바닥에 녹아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떼어 현관문에 다가갔다. 깜빡, 자동 센서가 켜지고, 아카아시는 맨발인 채로 문 앞에 서서 가만히 그 차가운 문에 이마를 기댔다. 기다림에 대한 대가가 제 손에 떨어져 줄까. 아카아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새카만 시야가 어지럽게 엉켰다.
쿠로오를 만났던 것이 언제였을까. 사실 만난 날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를 만났고, 후에 그에게 두근거림을 느끼기 시작한 날부터 자신은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이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카아시는 그 길을 택했다. 가시밭 길 속 드문드문 나타나는 그 황홀한 꽃밭에 저는 이미 중독된 후였으니,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 저는 그렇게 핑계를 댔다.
“쿠로오 상.”
제 부름에 흘깃, 저를 돌아보는 얼굴은 늘 같은 표정이었고, 아카아시는 그것에 이를 꽉 다물었다. 손을 뻗으면, 쿠로오는 그 손에 뺨을 기대왔다. 아카아시는 그 뺨을 어루만지며 반대쪽 팔도 뻗어 그 몸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 온전히 제 품에 기대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한 자신이 싫었다. 그것을 티 낼 수 없는 제 자존심 또한 더더욱 싫었다. 아카아시는 저를 마주 안아오는 쿠로오의 머리에 뺨을 기댔다. 쿠로오 특유의 조금 높은 체온이 뺨에 닿아왔다. 따뜻하고, 품에 가득 차는데, 마음이 허했다. 쿠로오, 쿠로오 상. 그렇게 속으로 부르는 것조차 버거운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쿠로오 상.”
“응.”
제 이름을 마주 불러오지를 않는다. 아카아시는 가늘게 눈을 뜨며 쿠로오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에 힘을 주어 그 뒤통수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아래로 쭉 쳐지며 휘어지는 눈꼬리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부족하다. 이걸로는, 부족해. 아카아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가 꾹 감았다. 늘 쿠로오의 앞에 서면 뛰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철컥-.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퍽 크게 울렸다.
“나 왔어-.”
집 안으로 들어서며 목소리를 늘인 쿠로오는 신발을 벗다가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집 안은 평소와 달리 불이 꺼져 있었다. 가만히 서있자 센서가 툭, 꺼지며 집안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눈을 깜빡이며 귀를 기울여도 집 안쪽에서 소리는 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리가 없는데. 손을 휘휘 내젓자 다시 불이 반짝, 켜졌다. 쿠로오는 훌훌 신발을 벗어 던졌다.
“아카아시?”
집 안으로 들어서며 그 이름을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어디 갔나? 쿠로오는 제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화면을 켜도 부재중 표시는 없었다. 연락도 안하고 어디를 간 거야.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 하며 외투를 벗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수화기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쿠로오는 문득 통화음 이외의 소리에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었다. 우웅-. 짧게 울렸다 끊어지는 소리는 진동음이었다. 쿠로오는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딸깍, 거실의 불을 켰다. 휑한 거실이 그대로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쿠로오는 진동소리가 나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 침대 위 눈에 익은 인영이 앉아있었다.
“……아카아시.”
쿠로오의 부름에 스륵, 고개가 돌아가 쿠로오를 보았다. 쿠로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있었으면 있다고 말을 해야지. 침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쿠로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아카아시를 보았다. 제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아카아시는 익숙했다. 푹 숙인 고개에 쿠로오는 고개를 갸웃, 하며 그 쪽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양 팔을 벌렸다. 제 품으로 걸어들어올 것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쿠로오는 제 양 뺨을 감싸는 손에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창백해 보이는 아카아시가 이마를 맞댔다. 조금, 식은 것 같기도 한 체온이었다.
“쿠로오 상.”
“아카아시?”
“쿠로오 상.”
뭔가 말을 할 것처럼 벙긋거리는 입술은 제 이름만 되뇌었다. 쿠로오는 제 뺨을 감싼 아카아시의 손목을 잡고 아카아시가 뭔가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쿠로오의 이름만 중얼거리던 아카아시는 다시 입을 다물고 손을 떼어내 쿠로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파묻히는 얼굴에 쿠로오는 그 허리를 마주 끌어안고 어깨에 입가를 댔다. 유난히 쳐져있는 분위기가 미묘했다.
“아카아시, 어디 아파?”
조심스레 묻는 말에도 답은 없었다. 허리를 끌어안았던 팔이 살짝 풀리고, 옷 안으로 슬쩍 손이 들어왔다. 부드럽게 등허리의 살결을 쓰다듬는 손은 평소와 달리 조금쯤 식어있었다. 묘한 기분. 쿠로오는 저를 이끄는 손에 따라 얌전히 침대 위로 누웠다. 평소 같았으면 씻고 하자고 했을 텐데, 아카아시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그냥 응해주기로 했다. 쿠로오는 제 입술을 몇 번 할짝이는 혀에 제 혀를 살짝 문질렀다가 슬쩍, 아카아시의 눈치를 보았다. 퀭한 얼굴이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의 불빛 탓에 어른거리며 보였다. 식은 손이 허리를 쓸어올리며 옷을 끌어올렸다. 손이 꾹, 가슴께를 눌렀다.
“읏, 좀, 아파.”
“아파요.”
“응?”
제 가슴을 꽉 누르는 손목을 저도 모르게 움켰던 쿠로오는 아카아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픈 건 자신인데, 정작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것은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 벙긋거리는 입술에 침대 위롤 짚고 있던 손이 콱, 목을 잡아 눌렀다. 컥, 숨통이 조여드는 소리가 짧게 터졌다. 가슴께를 누르던 손은 꼭 살갗을 뚫을 것처럼 얇은 살가죽 위를 손톱으로 후볐다. 쿠로오는 제 목 줄기를 누르는 손을 움킨 채 바르작거렸지만, 몸 위에 아예 올라탄 아카아시 탓에 몸을 들썩거리는 게 전부였다. 끅, 끄윽, 간신히 좁은 틈을 비어져 나오는 소리가 전부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아카아시의 손목이 쿠로오의 손톱자국으로 엉망이 되어갔다.
“왜 당신을 전부 가질 수가 없어요?”
“억, 끄, 윽, 끄으…….”
“왜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요?”
아카아시, 이것 좀, 놓고, 말해. 벙긋거리는 입술이 하는 말에도, 늑골을 쥐어뜯던 손마저 쿠로오의 목을 졸랐다. 입술이 점점 벌어지고, 눈이 점점 하얗게 까뒤집어졌다. 손목에 상처를 내던 손에도 힘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손이 툭, 침대 위로 떨어졌다. 바르작거리던 움직임마저 없어진 후에도 아카아시는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뚝, 뚝, 눈물이 바들거리는 움직임마저 없어진 얼굴 위로 떨어졌다. 미워요. 당신이, 미워. 너무 좋아서, 미워요. 꼭 저가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끅끅대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아카아시는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려 쿠로오의 가슴 위에 이마를 박았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을 빼앗길 것만 같았어.”
병신 같이, 말은 못하는 주제에. 목을 조르던 손을 천천히 풀며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가슴에 기댔던 얼굴을 들었다. 쿠로오의 목엔 이미 검붉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힘없이 늘어지는 쿠로오의 몸을 일으켜 품에 끌어안은 아카아시는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높았던 체온은 어느 새 미적지근한 채였다. 축축 늘어지는 등을 꽉 끌어안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가졌는데,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당신은 여전히.”
왜 여전히 차가워요. 옷이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젖어드는 옷마저 차갑게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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